자미산과 제7 건물터 넓은 들판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고 있는 해발 95.3m의 자미산은 북쪽 봉우리(하늘봉)와 남쪽 봉우리(자미봉)가 남북으로 놓여있는 마안형(馬鞍型)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자미산성 제7 건물터로, 2009년 동신대의 발굴조사 결과 7개소의 건물터와 남문터 유구가 확인됐다.

왕인문화축제 대한민국 대표축제 선정

새해 초부터 반가운 뉴스다. 1992년 ‘왕인문화축제’라는 지역축제로 출범한 왕인축제가 27년 만에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부 축제에 선정됐다. 인물을 형상화한 축제라는 한계를 극복하며 최근 5년 연속 문화관광부 유망축제로 지정받았던 왕인문화축제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전동평 군수가 언급했듯이 지속 가능하고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축제로 성장 발전하고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축제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왕인문화축제가 보다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왕인박사 연구가 심화되어 역사적 실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 지역 지자체에서 기획한 만화로 보는 마한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만화로 제작한 것은 청소년들이 마한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청소년 때의 역사인식은 평생가기 때문에 내용 및 서술자의 사관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마한이 369년에 백제 근초고왕 때 멸망 당했다는 내용을 토대로 만화가 구성되어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 고대사의 원형이 마한이고, 그 마한사의 중심에 영산강 유역의 마한 왕국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마한사를 인식하려는 발상의 전환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다.

마한사에 관심을 가지며 필자가 생각한 가설은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일대가 고대 마한 왕국의 중심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반남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도 이 지역에서 자체 제작한 왕관으로 이 지역 연맹왕국 국왕의 왕관으로 보았다. 금동관이 백제왕이 이 지역 ‘수장급 최고 우두머리’에게 준 위세품이라고 본 기존 학설에 정면 비판하였다. 작년 2019년 7월 초 시종 내동리 쌍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편이 신촌리 9호분과 동형의 것이라는 사실은 필자의 이러한 추론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필자는 시종·반남에 있었던 마한왕국이 마한왕국의 하나인 ‘내비리국’이라고 이미 주장한 바 있다. 그 내비리국의 중심지가 어디일까? 하는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다. 이때 필자는 반남에 있는 자미산성을 주목했다. 아직 마한과 연결지을 결정적인 물증은 나오지 않았으나 앞으로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뜻밖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갖고 있다.
 
마한의 흔적이 보이고 있는 자미산성

자미산에는 둘레 660m정도 되는 테뫼식 산성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88호로 지정된 이 산성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반남면 대안리 산 3-2번지에 위치하여 있다. 1999년 목포대의 정밀지표 조사결과 자미산성 안에 북문·남문터와 건물터 6곳이 확인되었다. 2009년 동신대의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 7개소의 건물터와 남문터 유구가 확인되었다. 산성 전체를 발굴 조사하면 더 많은 건물터가 확인될 것이라 믿어진다.

자미산과 관련된 민간설화나 견훤과 왕건의 각축장·삼별초 부대 주둔지 등의 전승이 내려오고 있는 자미산성은 주변의 대안리 고분군·덕산리 고분군·신촌리 고분군과의 관련성으로 인해 마한시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 이와 관련된 연구는 없다. 동신대 박물관의 보고서가 나오기 이전에 작성된 ‘나주시지’에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유물이 주로 찾아졌을 뿐 기대했던 고분시대의 유물은 찾아지지 않았다”고 하여 마한시대와 자미산성을 연결짓지 않은 채 산성의 자연 지리적 여건만 간단히 설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2009년에 이루어진 동신대 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자미산성의 역사적 성격을 밝힐 수 있는 적지 않은 유물이 나왔다. 이를 토대로 자미산과 연결된 전승 및 역사적 사실을 유기적으로 엮어 자미산성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복원해보고자 한다. 시의 북서부에서 북쪽 경계를 따라 산지가 발달한 나주 지형은 북쪽의 금성산(450.3m)을 비롯하여 나주호 남측의 국사봉(440.3m) 봉황면과 영암군 접경의 계천산(400m) 등 비교적 높은 산들이 있다. 이들 산줄기에는 여러 개의 산성이 있다.
 
자미산성은 시종·반남을 아우르다

이들 산과 달리 자미산 만은 넓은 들판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고 있는 낮은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너무나 대조적이다. 나주시 서부의 다시면 대박산(578m)으로부터 남동방향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자미산은 해발 95.3m의 북쪽 봉우리(하늘봉)와 98m의 남쪽 봉우리(자미봉)가 남북으로 놓여있는 마안형(馬鞍型)을 이루고 있다. 자미산 동남쪽에 있는 속칭 ‘봉현’과 ‘벌고개’를 사이에 두고 자미산과 연결된 54.9m의 낮은 봉우리 주변에는 고대 마한왕국을 대변하는 덕산리·신촌리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57.6m의 독후산이 자미산과 이어져 있는데 그 북쪽 편으로는 영암 신북면에서 발원한 삼포강이 흐르고 있다.

서쪽으로는 속칭 ‘석해들’로 불리는 널따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을 관통하는 29.4km의 삼포천은 영암 시종면 남해포에서 영산강 본류와 합류하여 영산강 하구둑이 생기기 이전에는 영산강을 통하여 바다로 연결되고 있다. 반남 일대는 자미산을 중심으로 영암 시종 지역과 서로 마주 보며 같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형성된 자미산성

자미산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반남면 일대는 대부분 표고 10m 내외의 낮은 구릉 지대를 형성하고 있어 자미산성에서 조망할 때 사방의 시야가 매우 넓다. 북으로는 나주 금성산, 북동쪽으로는 광주 무등산, 남쪽으로는 영암 월출산, 서쪽으로는 무안 승달산, 그리고 영산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혹자는 자미산성이 사방에서 쉽게 눈에 띄어 산성의 입지 조건으로 불리하다고 말하기도 하나, 멀리까지 한눈에 조망되는 이점은 다른 어느 성곽보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점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 산성은 식수원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약점이 있다. 자미산성 역시 식수원 부족을 약점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목포대 박물관에서 발행한 ‘자미산성’ 보고서에도 자미산성에는 식수원이 전혀 없고 산성 내부가 대부분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민들이 입주하여 거주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주군이 발행한 ‘마을 유래지’에 따르면 자미산성 안쪽에 있는 신촌리 성내마을에는 산림이 울창하고 식수로 사용할 물이 있어 사람들이 일찍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내용이 있어 식수원이 없다는 보고서와 충돌하고 있다.

동신대 보고서에서도 우물 1개소를 확인하였지만, 자미산성 북문 밖 30m지점 계곡 사면부에 있는 ‘용왕샘’이라 부르는 우물은 극심한 가뭄에도 절대로 고갈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자미산과 이어진 선왕산 끝자락 칠성사 바로 아래쪽 샘은 비교적 큰 방죽인데, 자미산 끝자락과 이어지는 선왕산에 칠성사란 절이 있었다. 절터에서는 지금도 옛날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어 실제 절이 있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렇듯 자미산성은 식수원도 확보되어 산성의 약점도 극복하고 있다. 게다가 넓은 평야의 중앙에 있어 인적·물적 공급기반도 넉넉하다. 자미산성 주변을 통과하여 흐르고 있는 삼포천을 이용하면 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다 주변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유리한 지리적 여건도 갖추고 있다. 자미산성은 반남·시종 등 영산강 유역을 아우르는 정치세력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모두 갖추었음을 알 수 있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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