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2>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과 남해신당(中)

부안 죽막동 출토 유물과 일본 오키노시마 섬 섬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오키노시마 섬은 부안 죽막동 해양제사 유적과 매우 흡사하다. 부안 죽막동 유적이 전라북도 차원에서 세계유산 등재작업이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시종의 남해신당도 죽막동 유적이나 일본의 오키노시마 유적처럼 4세기 무렵에 이미 존재했고, 해신당의 발전과정이 살펴지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 세계문화 유산 목록에 등재된 문화재를 말한다. 역사, 예술, 학문적으로 뛰어난 보편적 세계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지정한다.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장성 필암서원 등 아홉 개의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에서 11번째에 해당한다.

유네스코에서 말하는 유산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현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고 미래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세계유산’이라 함은 ‘한 민족, 한 국가에서만 보존되고 전승되어야 할 유산이 아니라 전 세계인이 공동으로 지키고 전승해야 할 유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유산은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기 때문에 지속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유산 가운데 일부는 독보적인 특징으로 인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도 있어야 한다.

세계유산은 문화발전의 단계가 설명돼야

유네스코 등재유산은 크게 세계유산, 인류 무형유산, 세계 기록유산 등으로 구분된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세계유산은 다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으로 분류되고 있다. 문화유산은 서울 종묘처럼 인류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축이나 경관이 탁월한 사례 등을 말한다. 자연유산은 제주도 용암동굴처럼 지구 역사상 주요 단계를 입증할 수 있는 특징을 지녔을 때 선정되고 있다.

앞서 살핀 부안의 죽막동 해양제사 유적지는 출토 유물들을 통해 제의가 4세기 중반에는 토기를 중심으로 노천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다 5세기 전반에 이르러 공헌용의 석제 모조품을 가지고 제사를 지낸 데 이어, 5세기 후반에 큰 옹기 안에 마구나 무기, 거울 등을 넣어 봉헌하는 의식으로 점차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은 비록 소량이 출토되기는 하나 출토 유물로 보아 토기 중심의 제사가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국시대와 같은 노천제사를 벗어나 건물 내에서 제사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도 기와가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 내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제기만 백자로 바꾸어졌을 뿐 제사 양상은 고려시대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도 내려오고 있는 죽막동의 수성당제는 19세기 중반부터 수성당이라는 독립된 제당을 갖고 제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죽막동 유적은 해양제사 양상의 변화상

이처럼 죽막동 유적은 현재 확인되는 유물만을 가지고 볼 때 4세기 이후 해양제사 양상의 변천 모습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해양 유산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곧 마한시대 이래 해양제사 유적임을 말해주고 있다. 일부에서는 죽막동 유적을 백제의 해양제사 유적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나 4세기 무렵이면 전북지역은 아직 마한의 영역에 해당하므로 마한시대의 해양제사 유적이라고 설명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양 제사유적은 일본의 오키노시마(沖ノ島) 제사유적과 흡사한 면이 있다. 2017년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오키노시마 제사유적은 4세기 후반에서 9세기 말까지 암상(巖上) 제사에서 노천제사로 변천해온 고대 해양제사 유적으로 8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로 볼 때 대략 4세기 무렵이라는 시기와 노천제사 형태라는 점은 죽막동 유적과 비슷하다.

다만 죽막동 유적이 항로 주변 지역으로 물자보급과 휴식의 기능이 있는 반면 오키노시마는 항로 이탈지역에서 위급시 피난장소의 기능을 하였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두 지역이 해양제사 유적지라는 점에서는 거의 공통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죽막동과 비슷한 일본 오키노시마 유적

변산반도에 위치한 죽막동 해양제사 유적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오키노시마 해양 제사유적과 여러 면에서 공통된 특질을 보인다. 따라서 세계유산 지정문제를 전라북도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마한문화공원 입구에 위치하여 해양제사 의식이 이뤄지던 남해신당도 이러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1998년 목포대학교 박굴관이 남해신사 터를 발굴할 때 상단은 묘당, 하단은 대기장소로 추정되는 상·하 두 단의 신사 내부시설이 확인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해신제의 규모와 유구가 확인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죽막동 유적에서도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고, 양양의 동해묘 또한 현재 복원돼 있기는 하나 구체적인 유구는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남해신당이 죽막동 유적이나 일본의 오키노시마 유적처럼 4세기 무렵에 이미 존재해 있었고, 해신당의 발전 과정이 살펴진다면 충분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도 손색이 없다 하겠다.
 
남해신당 유구확인은 우리나라서 유일

다만, 이곳 남해신당 발굴결과 15, 6세기 분청사기와 백자 등이 출토되어 조선시대에 제의가 행해졌음이 확인되었을 뿐 그 이전 시기, 즉 고려시대에 해신당의 실체를 입증해줄 만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고 있다. 목포대 발굴 보고서에는 백자 등의 유물로 보아 조선시대 이후 그곳에서 제의가 행해졌을 것이라는 언급만 있을 뿐 그 이전인 고려시대의 설명이 없다. 말하자면 출토 유물만으로는 남해신당이 고려 이전에 해신제가 이루어진 곳이라는 증거는 찾을 수 없는 셈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남해신당이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분명히 있었다. 목포대 박물관의 조사보고서에 “남해신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적 기록으로는 증보문헌비고에 ‘고려 현종 19년(1028년) 비로소 사전에 올렸다’라고 되어 있다. 그 결과 남해신사는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전남지방에서 국제로 등록되었다”라고 서술하며, 고려·조선 시대에 해신제를 모셨던 3대 신사의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남해신당은 고려·조선 시대에 동해의 양양의 동해묘, 서해의 풍천의 서해단과 함께 3대 해신당의 하나로 이해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남해신당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중요

하지만 목포대 보고서의 서술은 부정확한 곳이 적지 않은데다 남해신당의 역사적 위치를 밝히기에는 미흡한 면이 많아 재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남해신당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이 ‘증보문헌비고’라고 언급하였는데, 조선 초에 서술된 ‘고려사’ 현종 16년조에 ‘陞南海神祀典’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곧 현종 16년에 ‘남해신을 사전에 승격시켰다’는 것으로, 고려왕조가 국가 차원에서 남해신당을 관리하였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에 명백히 나와 있는 남해신당에 관한 기록이 구한말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 처음 언급되었다고 살핀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현종 19년’도 ‘현종 16년’의 오기이므로 바로 잡아야 한다. 최초의 전문 발굴 보고서가 사실관계에서 오류를 범하다 보니 일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전문가들조차 이를 확인함 없이 인용하는 오류를 범하여 남해신당에 대한 사실관계가 혼돈스럽다.

여하튼, 적어도 고려 현종 때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당이 남해포에 있었음이 기록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비록 유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기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부안의 죽막동 신당처럼 남해포의 해신당은 고려 훨씬 이전 시기에 이미 존재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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