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5)
■임진왜란과 영암의병

양달사 의병장, 영암 대첩

달량진을 시작으로 장흥·강진·병영·진도·완도까지 왜구에 침략을 당했고, 북상한 왜구는 영암읍까지 쳐들어 와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왜구는 영암향교에 진을 치고 주둔하면서 위판(位版)을 불태우고 약탈한 재물을 소와 말 위에 나눠 싣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영암향교로 들어가 위판과 제기를 망가뜨리고, 때때로 촌락에 나와 노략질을 해댔다. 그럼에도 우도방어사 김경석은 두려워 감히 싸울 계책을 세우지 않고 성으로 들어와 자신의 안위만 지키고 있었다. 당초에 전주부윤 이윤경이 우도방어사 김경석에게 영암에 진을 치고 머무르면서 나가 싸우기를 청하여도 김경석이 오히려 듣지 않다가 군교들이 만일 패하게 되면 혼자 죄를 받는다고 재삼 간청하자, 김경석은 마지못해 나가 싸우라고 허락만 할 뿐 자신은 성안에서 꿈쩍도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친상을 당하여 해남 현감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영암 도포 봉호정에서 시묘하던 양달사는 “임금과 부모는 한 몸인데 어찌 예제(禮制)에 매여 국가의 난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라며 상복을 입은 채 동생 달수와 함께 영암성에 들어가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모집하니 평소 공의 뛰어난 지략에 감복하던 백성들이 다투어 군에 응모하였다.

양달사는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진두지휘하면서 왜구와 격전을 벌였다. 양달사 의병장은 왜구의 숫자나 병기 등으로 보아 신묘한 전술만이 격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양달사 의병장은 왜구를 현혹하기 위하여 꽃 패랭이와 알록달록한 옷을 입힌 광대들로 창우대(倡優隊, 農樂隊)를 조직하여 왜구의 진 앞에서 온갖 희롱을 부리면서 일부 무장병을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변복하여 창우대에 합류시켰다. 여기에 정신이 팔려있는 왜구를 역고개 넘어 매복해 있던 병사와 의병이 일제히 공격하여 왜구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어 앞쪽에서 광대들도 협공하였고, 성안의 노소 백성들도 징 등을 두드리며 왜구의 뒤를 추적하여 대승을 거두니 죽인 자의 수효가 100여 급이었으며, 양달사도 10여 군데 상처를 입었다.

양 의병장은 병사를 모아 잠시 쉬게 하였는데 왜구들이 추격해오니 한편 싸우며, 다른 한편으로는 퇴각하던 중 말의 발이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양 의병장은 손으로 말의 갈기와 꼬리를 잡아 끌어내어 다시 오르려는데 왜장이 칼을 던지매 양 의병장은 이를 피하였으나 그만 말이 이에 맞아 거꾸러지고 말았다. 양 의병장이 급히 성에 들어가 만호 박천추의 말을 빌려 타고 적을 유인하니 적이 쫓아왔다. 양 의병장이 거짓으로 패한 척하고 도망치다 금교(金橋)의 진흙밭에 이르러 말을 옆구리에 끼고 번개처럼 이를 지나니 적들은 쫓아오다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양 의병장이 말을 돌려 한칼로 모두 죽였다. 비로소 정부군이 이르러 함께 적들을 섬멸하는데 합류하였다. 장사들이 전주부윤 이윤경의 지시를 받고 분개하고 원망하면서도, 3일간 결전하여 왜구 100여 명의 머리를 베자 남은 적들이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영암전투가 끝나고 평정을 되찾자 조정에서는 영암전투의 공과를 논했으나 양달사 의병장의 공은 온데 간데 없고 좌도방어사 남치근과 전라순찰사 이준경에게 공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장흥부의 원벽에는 당시의 전황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양달사 의병장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관군이 왜적과의 접전을 피하는 비굴한 행태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붙였다.

양달사 의병장은 왜구를 평정한 공에 대해 “상중에 나서서 군무에 종사한 것이 임금의 명으로 한 것이 아닌데 공을 자랑하며 상을 구함은 내가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겸양을 갖추었다. 그 뒤 상처의 독이 병이 되어 1년 만에 별세하였으니 그의 나이 겨우 41세였다. 영암군민들이 눈물을 흘리고 길가는 사람들도 탄식하며 “그때 양공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어육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왜구 침입이 있은 이래로 을묘년 호남의 승첩 같은 일이 없었는데 만약 공이 몸을 내던져 육박전을 벌여 먼저 그 예기를 꺾지 않았다면 아무리 원수와 방어사의 군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전승의 공을 한쪽의 반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영암군민들은 말했다.

그 후 200여 년이 지나고 을묘왜변이 평정된 지 290여 년이 지난 헌종 13년 1847년 10월 19일 양달사는 좌승지에, 동생 참봉 양달수는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 일어나

한편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장기간에 걸친 내란을 수습하고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불평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고자 임진·정유왜란을 일으켰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은 약 15만8800명의 병력으로 조선 침략을 시작하였다. 이들 중 소서행장이 지휘하는 왜군 2만명이 700척의 배를 타고 부산포에 상륙한 다음 날, 부산성을 점령하고 4월 15일 동래성을 쳐들어갔다. 부산과 동래에서는 정발과 송상현이 분전하였으나 함락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신립에게 적을 막으라 했으나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패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선조는 4월 30일 폭우가 쏟아지는 칠흑 같은 새벽에 한양을 버리고 피난 갔다. 부산상륙 20여일 만인 5월 3일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6월 22일 압록강변 의주에 도착하였다. 왜의 육군은 세 길로 나누어 한양으로 북상하였다. 왜군은 북상한 지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계속하여 북상, 평양과 함경도 지방에 이르렀다.

전쟁 초기에는 왜군의 전력이 우세하여 육전에서는 우리가 극히 불리하였다. 백성들과 관리와 군인들까지도 도망가기에 바빴다. 5월 초에는 전라도 군대 8천 명을 지휘하고 북상 중이던 전라관찰사 이광은 선조 임금이 피난가고 한양이 왜적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자 공주에서 갑자기 군대를 해산해 버렸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지역별로 의병장을 중심으로 농민과 노비들로 이루어진 의병이 활약하였다. 경상도 의령 곽재우, 전라도 광주 고경명, 나주 김천일, 충청도 조헌, 함경도 길주 정문부가 대표적인 의병장들이다.
전라관찰사 이광의 군대 해산 조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전 수원부사로 있던 김천일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고경명에게 이광을 먼저 처벌하고 군사를 모아 북상하자고 편지를 보낸다. 나주에 기거하던 김천일은 나주를 시발로, 고경명은 광주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나라를 위한 충의정신을 가지고 싸웠기 때문에 ‘의병’이라 부른다. 의병을 조직하고 지휘한 사람은 전직 관리, 유학자 승려들이었고, 주력은 농민들이었다. 큰 전과를 거둔 의병장으로는 곽재우·조헌·정문부 등과 호남 출신으로는 고경명·김천일·최경희·임계명 등을 들 수 있다.

많은 영암 의병들이 이순신·고경명·김천일 막하에서 싸웠다. 심지어 3부자·3형제가 참전하여 순국한 경우도 많았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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