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1>지석묘와 전라도 정신(下)

석평 유적과 공열 토기 보성은 좁은 산곡을 헤쳐 곡류하는 보성강 물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철제 농기구가 필요 없는 충적토 지대였음을 보여주는 석평 유적(사진 왼쪽)과 외부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주는 공열 토기 모습.

지난 호에 보성강 유역의 지형적 특징들이 외부 문화의 유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음을 간단히 언급하였다. 높은 산악지대를 흐르는 보성강은 장년기의 당당한 모습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유속이 빨라 노년기의 느릿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 다른 지역의 강들과 비교된다.

이 때문에 보성강 유역은 작은 분지나 지류들의 침식 활동으로 형성된 소규모 침식평야들이 대부분으로, 영산강처럼 넓은 평야지대가 없어 작은 규모의 읍락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마한 소국들이 산곡(山谷)에 흩어져 있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형상 소규모 정치 세력들이 공존

또 보성 지도를 유심히 살피면 좁은 산곡을 헤쳐 곡류하는 보성강 물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곳이 광곡천, 보성천, 미력천 등 여러 하천이 합류하여 강폭이 크게 넓어지며 곡류를 한 미력 화방리 용지 등 일대인데, 이곳은 전형적인 범람원으로 비옥한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일찍부터 큰 취락이 형성되었을 법하다. 강 반대편 송림 유적과 그곳에서 8㎞도 채 안 떨어진 겸백면 석평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이러한 사실들이 확인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사어향(沙於鄕)’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 상당한 세력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화방리 뒷산 백운산 선인봉 아래의 장동마을 일대에 있는 백제성터도 주목된다. 백제 때 보성지역을 복홀군(伏忽郡)이라 불렀는데, ‘홀’이 ‘성’을 뜻하는 백제식 음이라는 점과 관련지어 보면 ‘복홀군’ 치소가 있었다 하겠다. 백제에 편입되기 이전부터 큰 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지석묘의 고장, 보성’이라고 할 만큼 지석묘 밀집도가 높은 보성강 유역은 지형적인 특성에 따라 분포 규모의 차이가 있다. 80기 이상이 밀집된 율어면 문양리 양지마을을 비롯하여 인근 율어리 우정마을(47기), 문덕면 죽산리 하죽(68기)과 동산리 법화(32기), 복내면 일봉리 일와(39기)와 복내리 도화(48기), 시천리 살치마을(47기) 등 보성강 중류지역과 상류의 겸백 도안리(40기) 일대에서 밀집도가 높다. 반면 5기 미만의 소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보성강 유역은 대국에 버금가는 세력도 있지만, 읍락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경우도 많음을 알려준다.

한편 석평 유적에서 철기류와 관련된 출토 유물로는 수정을 가공하는 공방에서 사용된 철촉, 철도자, 철부 등이 약간 보일 뿐, 철제 무기류나 철제 농기구는 보이지 않는다. 철제 농기구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지역 토양이 철제 농기구가 필요 없는 충적토 지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망추와 같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어업의 비중도 적지 않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전통적 채집경제 유습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경제기반이 갖추어져 있는 보성강 유역은 철기제작과 분배를 통한 사회발전이 나타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공동체를 장악할 강력한 정치세력은 없어

그러나 석평 유적에서 50㎡가 넘는 주거지가 나타나는 등 주거지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집단 내의 위계화가 진행되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거대 지석묘가 눈에 띄지 않고, 대형 주거지도 읍락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연맹장 힘이 연맹 전체를 완전히 장악할 정도로 강대하였다고 볼 수 없다.

보성강 곳곳에 형성된 소국들이 분립성과 토착적 전통을 가졌다는 것은 지석묘 군이 읍락 별로 무리지어 있고, 묘제로 오랫동안 기능하고 있는 데서 짐작된다. 이는 집단 간의 통합을 저해하여 연맹왕국의 발전을 더디게 한다. 석평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별도의 공방이 있는 등 독립된 생활체가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통합작업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립성과 토착적 전통은 정치적 통합을 지향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때로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을 법하다.

원형과 방형의 주거지가 공존하고 있는 석평 유적에서 처음에 형성된 원형 주거지가 차츰 방형 형태로 변경되고 원형보다 방형이 많음이 확인되었다. 원형은 주로 경남지역을 비롯하여 전남 동부지역의 주거지 형태인 반면, 방형은 서부 영산강 유역 형태로 알려져 있다. 보성강 유역은 방형 형태가 일찍 나타났을 뿐 아니라 비율도 높다. 보성강이 시작되는 노동 거석리 구주 지역에서 방형 주거지가 확인되고 있지만, 영산강 유역에서 나타난 주구토광묘가 장흥 탐진강을 거쳐 보성강 상류를 통해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석평·송림 유적 등 보성강 유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타날문 토기가 해남 군곡리 유적, 보성 금평 유적과 조성리 유적, 순천 낙수리 유적에서 공통으로 보인다. 송림 유적은 석평 유적에 인접해 있어 같은 성질의 토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룡산이 가로막고 있는 득량 지중해 연안에 있는 조성리와 금평 유적, 심지어 군곡리 유적에서 나왔던 토기가 보성강 유역에서도 나왔다는 것은 마한남부 연맹체 내부에서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외부 문화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그런데 보성강 유역의 원형 주거지에서는 전남 동부지역은 물론 영산강 유역 등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은 공열(孔列) 토기가 나오고 있고, 장방형 주거지에서 타날문 토기 등이 출토되는 등 독특한 특징이 보이고 있다. 방형계 주거형태가 유입되었다 하더라도 영산강 유역에서 유행된 4주식 주거형태가 보성강 유역에서 상대적으로 희소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외부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함을 보여준다. 보성강 유역에서 나타난 이러한 독특한 문화 현상은 이 지역의 정체성이 반영이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분립성을 강고하게 가졌던 보성강 유역 연맹체의 특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성강 유역 연맹체들은 전남 동부지역 문화는 물론 서부 영산강 문화도 받아들이고, 심지어 석평 유적과 송림 유적의 가야식 고배에서 알 수 있듯이 소가야와도 교류하였다. 이는 보성강 유역 연맹체들이 산악지대에 가로막혀 폐쇄적인 성격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보성강을 통해 외래문화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토착적 전통에 새로운 문화를 가미한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보성강 유역 문화의 특질이 형성되었다고 믿어진다. 이는 고유 양식보다는 가야, 백제, 영산강, 왜 등 외래요소가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문화 점이 지대의 성격이 강했던 득량 지중해 연맹왕국과 비교된다.

전라도, 열린 마음을 지닌 공동체 정신

전남지역 그 중에서도 유난히 보성강 유역에 집중된 지석묘들을 분석하여 그것이 이 지역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이 있음을 살폈다. 아울러 경남지역과 달리 집단 사이의 세력 차이가 크지 않고 집단 내에서도 위계화가 뚜렷하지 않아 집단 내부에서 우두머리와 일반 백성이 잡거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의 특성이 그대로 확인되고 있음을 살폈다.

바로 이러한 데서 상대를 인정하는 이 지역의 배려와 공동체 정신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고유한 묘제를 지켜온 전통은 기존 문화에 외부 문화의 유입을 능동적으로 제어하며 독자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전라도 정신의 모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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