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05>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과 마한의 사후 세계관

지난 주말 제5회 전국청소년 마한역사문화 탐구대회가 국립나주박물관에서 열렸다. 예선을 통과하여 본선에 오른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보고서 및 동영상, ‘마한신문’ 제작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만든 학생들의 뜨거운 경연이 있었다. 심사위원장으로 대회를 참관한 필자는 대회가 이어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되면서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마한사 교육자료 개발이 시급하다

학생들의 참여주제가 대부분 마한인의 생활상을 다루었다. 마한의 실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는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인정되고 있지 않은 4세기 후반 백제가 전남지역을 지배하였다는 오랜 주장이 아직도 학생들의 발표내용에 담겨 있었다. 백제의 마한이 아닌 마한의 백제에 대한 인식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미래의 우리 지역을 이끌어 갈 청소년들의 인식 수준이라는 점에서 심히 우려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 지역에서 추진된 마한사 연구 및 교육의 실정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따랐다. 마한의 심장부에 위치한 영암에서는 중·고등부 출품작품이 없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지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최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 ‘고대 동아시아의 금동신발과 금동관’이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잘 알다시피, 나주 다시들 회진마을 앞 영산강 북안 강변에 형성된 충적평야에 위치한 복암리 고분군은 다양한 묘제가 복합된 국내 유일의 고분이다. 복암리 고분군은 한 가문의 선산으로서 고분인 줄 모르고 사용되었기 때문에 도굴을 피할 수 있었으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아파트형 고분이라 하여 여러 형태의 고분들이 층위를 달리하여 발굴되어 마한사회의 변화를 살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그곳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지난 호에 언급한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금동관편은 이 고분의 피장자의 신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금동신발에 묻어 있는 파리 유충을 분석하여 고대 마한사회의 장례풍속이 빈장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밝혀낸 것처럼 마한사회의 실체를 복원하는 데 있어 결정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국립나주박물관에서는 지난 10월 8일부터 2020년 1월 5일까지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마한사람들 큰 무덤에 함께 잠들었다’라는 주제의 특별전을 열고 있다.
 
사후 세계를 반영한 금동신발 장식문양

5년 전인 2014년 정촌고분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금동신발이었다. 금동신발이 출토된 것은 정촌고분이 처음은 아니다. 현재까지 30여 점의 금동신발이 보고되고 있고, 나주에서도 1917 신촌리 9호분과 1996년 복암리 3호분 96석실에서도 이미 금동신발이 출토된 바 있다. 나주에서 세 번째인 셈이다. 그렇지만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처럼 다양한 문양이 새겨 있는 것은 고창 봉덕리 고분 1호분 출토 금동신발과 경주 식리통 출토 금동신발 등 3점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발견 당시 모습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양호한 상태였고, 신발 중앙에 연결된 용머리 장식은 지금껏 발견된 금동신발에는 없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었다.

중앙에는 기본적으로 육각문이 배치되었으며, 그 안쪽에는 용, 봉황, 두 귀의 짐승류, 인면조신(人面鳥身), 수두조신(獸頭鳥身) 상 등이 장식되어 있고 다른 금동신발에는 이제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일신양두(一身兩頭)형 문양이 확인되어 이채롭다. 이 가운데 좌우측 판에 무려 7~10개의 용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용을 7마리나 장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정촌고분 사례가 유일하다. 이러한 금동신발에 보이는 장식 내지는 문양의 특성을 통해 당시 마한인들의 사후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용머리 장식은 천상계로 올라가려는 간절함

금동신발 내부에서는 발뼈로 추정되는 인골이 확인되었다. 이로 보아 금동신발은 피장자의 발에 착용되었다고 추정된다. 금동신발에 다수의 용을 장식한 이유는 용이 끄는 수레 즉 이동수단을 금동신발에 시각화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신발 중앙에 연결된 용머리 장식은 좌우측 판에 표현된 다수의 용을 이끄는 우두머리이자 용을 이용한 이동수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이다. 말하자면 금동신발에는 용이 끄는 수레를 탄 피장자가 오색구름을 지나 선계(仙界) 혹은 천상계(天上界)로 가고자 하는 기원이 담겨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 건국의 주인공 주몽도 하늘에서 황룡(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맞아오게 하였다. 당연히 주몽은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고, 황룡은 그 이동수단인 셈이다. 정촌고분 금동신발에 용이 장식된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여겨진다.

해방직후 김재원 박사가 단군신화의 실존을 확인하기 위해 설명한 중국 무씨(武氏) 사당의 화상석에 용을 타고 가는 선인이 나온다. 이 화상석 3단에는 세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는 두 사람의 선인(仙人)이 있고, 앞뒤에도 역시 용을 타고 가는 선인들이 표현되고 있다. 비록 세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이나 용을 이동수단으로 이용한 점에서 정촌고분 금동신발과 흡사하다. 용 이외에도 보이는 새를 비롯하여 다수의 상서로운 짐승들의 형상은 사자(死者)의 승천을 위한 인도 혹은 안내자 역할로 추정된다. 곧 금동신발의 용머리 장식은 사자(死者)가 천상계(天上界)로 승천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인면조신(人面鳥身), 수두조신(獸頭鳥身)은 영생, 장생불사 등 생명 연장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육각문은 중국 북조에서 넓은 의미의 길상문으로 여겨져 주로 고분의 기본 문양으로 사용되었던 형태이고, 금동신발 바닥 연화문도 천상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연화문 상하단에 배치된 괴수상(怪獸相)은 천상계를 지키는 수호자이며 사기(邪氣)를 물리치는 辟邪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일신양두(一身兩頭)형 문양은 지신(地神)과 지구 자전축인 지축(地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신과 지축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벽화는 도교와 관련이 있다. 고구려 벽화가 도교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신도 벽화에서 익히 아는 바이다. 그렇다면 정촌고분의 이러한 문양은 당대인들이 땅의 신인 지신과 세상의 중심을 의미하는 지축으로 사후 세계를 인식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영산강유역 고대 마한지역에도 도교사상이 유입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정촌고분의 육각문이 중국 남조보다는 북조 계통에 가깝고, 용머리 형태는 고구려 무용총의 청룡과 흡사하며, 앞서 언급한 지신과 지축의 도상이 평안도 강서군 덕흥리 고분출토의 것과 거의 동일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관련성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고분문화가 백제에 전파되었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금동신발이 마한의 세력가에게 위신재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이미 4세기 후반 마한지역 즉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영역에 들어갔다는 전제아래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왜 정촌고분의 금동신발 문양이 다른 지역의 출토 금동신발 문양과 유난히 다른 독특한 형식을 지녔는가에 대한 충분한 답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피장자가 국왕급임을 알려주는 용의 형상

오히려 정촌고분의 출토 금동신발이 지닌 독특한 문양은 이 지역만의 고유한 문화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고구려를 세운 주몽처럼 용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천상계에 올라갔다는 것은, 고분의 피장자 신분이 단순한 토착 세력이 아닌 이 지역을 통치한 여왕 내지는 국왕의 여성 배우자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다만, 고구려적 요소가 보인다고 하여 고구려 문화의 영향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두 지역 및 중국과의 교류 내지는 도교사상의 유입 등을 통해 형성된 문화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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