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04>다시들 정촌고분 인골(人骨)과 마한사회

가야사에 비해 절대 빈약한 마한사 연구

한국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당시를 알 수 있는 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에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특히 문헌사료는 최치원의 문집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편이다. 우리가 1차 문헌사료라고 알고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몇 세기 지나서 당대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편찬된 것으로 한계가 있다. 이러한 문헌자료의 부족은 그 당시에 세워진 비석과 같은 금석문을 통해 보완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땅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단양 적성비나 충주 고구려 비가 그 대표 사례라 하겠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의 원형을 형성하고 있는 마한사는 국내 사서에는 몇 군데 제외하고는 거의 보이지 않고 오히려 중국 측 자료, 특히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많이 기술되어 있어 이에 의지하여 마한사회를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 조차 중국인의 관점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철저한 사료 비판이 따라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마한사는 같은 시기의 가야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마한사 연구에 있어 유적·유물에 대한 조사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다. 그런데 가야사는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와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최근 30여 년 동안 집중적으로 발굴·조사·연구가 되어 상당부분 실체가 드러났다. 최근에는 그 주변 지역까지 발굴조사 영역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유적·유물들이 출현하고 있다.

시종 고분군 정비 하루바삐 서둘러야

그러나 마한의 심장부인 영산강 유역을 비롯하여 보성강 유역의 발굴조사는 경주(신라), 부여·공주(백제), 김해·고령(가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걸음마 단계라 하겠다. 영암 시종의 대형 고분군들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부분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마한의 심장부였던 찬란한 마한 왕국의 실체를 밝혀내야 한다. 그래야만 마한축제도 그 정체성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도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마한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지금 마한 관련 유적·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동안 마한지역의 발굴·조사·연구를 보면 단순히 고분의 구조나 유물의 외관상 특성을 찾는 데 한정하였다. 그러다 보니 고분이 발산하는 수많은 현상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말하자면 충분하지는 않지만 사료 부족을 메꿀 수 있는 적잖은 유적·유물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물에서 발산되는 많은 현상들을 제대로 주목하지 못했다. 최근에 들어와 첨단과학 기술을 동원하여 유물의 미세한 부분까지 찾아내고 인접 학문과 융합연구를 통해 유물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다시들’의 정촌고분 유물 분석에서 시도된 고고학과 법의학 사이에 이루어진 학제 간의 융합연구가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파리 유충에서 빈장(殯葬) 풍습 확인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신발의 서편 바닥과 동편 인골 부위(발뒤꿈치)쪽에서 10여 개의 파리 유체, 즉 파리 번데기 껍질이 확인되어 관련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었다. 일반적으로 파리가 시신부패 과정에서 생성되는 부패가스에 잘 유인되기 때문에 파리 유체가 무덤에서 발견되는 일은 무덤이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우에는 드물지 않다. 하지만 15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경과한 후에도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발견되는 사례는 매우 희귀하기 때문에 관심을 더욱 끌었다.

국내에서는 비단벌레의 날개를 장식 재료로 사용한 천마총의 말 안장이나 1973년에 발굴된 경주 계림로 14호 묘의 화살통과 같이 인위적으로 제작한 장식품에서 발견된 사례들은 있다.
그러나 당시의 장례절차와 매장과정 등과 관련하여 우연히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곤충의 일부가 이렇게 발견된 경우는 국내에서는 최초의 사례였다. 국립 나주문화재연구소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팀은 2016년 파리 번데기 껍질이 왜 금동신발 뒤꿈치에 묻어 무덤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밝히려는 작업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본란을 통해 언급한 바 있거니와, 이처럼 고분에서 파리 번데기 껍질이 출토된 사례를 분석하여 그것을 연구한 사례가 일본에서 이미 있었다. 일본 하지이케 고분 출토 인골에서 발견된 쉬파리과와 집파리과의 깜장파리속 파리 번데기 껍질을 분석하여 파리가 활동하는 밝은 장소에서 장례절차인 ‘빈’(殯)이 적어도 수일간 행해지고, 일주일을 넘기고 수일이 지나면 장례를 마치고 매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장례를 치를 때까지 8일 밤낮으로 곡하고 슬피 노래를 불렀다는 ‘일본서기’의 구체적인 실증자료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외국사례를 ‘법곤충의학’과 연계시켜 시체에 있는 곤충의 알→구더기→번데기→성충으로 이어지는 생활상과 사망 후에 경과되는 시간을 산출한 결과, 파리가 번데기 상태일 때만 성충이 되고, 알에서 번데기가 되는 데까지는 평균 6.5일 정도 걸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파리 알이나 구더기는 고분과 같은 환경 속으로 들어가면 바로 동면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에 번데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정촌고분의 출토 금동신발 등에 묻어 있는 파리 번데기 껍질은 피 매장자가 사망하고 바로 고분에 매장되지 않고, 파리가 시신에 충분히 접근하고 산란할 수 있는 계절과 장소에서 금동신발을 착용한 상태로 최소 7일 이상 노출된 후, 파리가 시신과 함께 고분 안으로 들어가 매장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말하자면, 정촌고분 1호 주인공은 무덤 밖에서 일정기간 장례절차를 거친 다음 무덤에 안치되었음을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당시 다시들 지역에는 시체를 매장 전에 빈소에 안치하였다가 최소한 7일 정도 지나 장례를 치르는 장제(葬制)가 유행했다는 의미이다. ‘복장’ 곧 ‘빈’(殯)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확인한 것은 우리나라 고분출토 유물 연구에서 융합과학이 이룬 최대의 성과라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옥저·고구려 등의 연맹왕국 시대에 이미 이러한 빈장이 있었다는 기록을 한반도 남부의 마한 땅에서도 이러한 장례 풍속이 있었음을 고고학적으로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정촌고분 여주인공은 국왕의 배우자 가능성

그런데 최근 같은 정촌고분의 출토 인골을 과학적인 분석과 법의학적인 해석을 통해 확인된 인골 2구는 뼈의 특성으로 보아 모두 40대의 여성이며 동쪽 인골의 키는 146㎝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의 주인공이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공주 수촌리 8호분의 피장자를 여성으로 살핀 연구에서 이 여성이 백제 왕실의 사람이며 결혼을 통해 수촌이 최고 수장의 배우자가 분명하다는 연구가 있다.

정촌고분의 경우도 1호 석실이 3기의 목관 가운데 가장 화려한 부장품이 피장자가 여성인 목관에 있다. 이 고분의 피장자인 여성은 5세기 말 내지 6세기 초에 40대의 나이로 추정되고 있다. 필자가 누차 언급한 바처럼 이 시기는 아직 이 지역이 백제의 지배와 무관하고 그곳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금송으로 된 관 등은 백제와 무관하다고 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정촌고분의 여성 피장자는 어쩌면 이 지역을 지배하였던 연맹왕국 국왕의 배우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쩌면 일본을 지배하였던 히미코(卑弥呼) 여왕처럼 여왕일지도 모르겠다.

설사 배우자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화려하게 부장품이 관에 들어 있는 것은 당시 이 지역 정치체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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