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03>백제의 멸망과 마한 정체성(下)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 당에 유학을 간 신라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최치원은 마한-고구려의 역사인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곧 통일신라 시대에 형성된 인식의 반영이다. 사진은 중국 양주에 있는 최치원 동상과 기념관(오른쪽 사진) .

마한축제, 전라남도 축제로 통합되다

지난 10월12~13일 양일간 영암 시종의 마한문화공원에서 마한축제가 열렸다. 축제준비위원 자격으로 이틀간 현장에서 축제를 지켜보았다. 축제를 구경하러 온 관람객의 숫자가 작년보다 훨씬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외국인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마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기획 의도와 다양한 프로그램이 결합된 때문이라 하겠다.

이번 마한축제가 유난히 뜻깊었던 것은, 필자가 본란을 통해 누차 지적한 바 있는 영암과 나주지역이 각기 별도로 추진하던 ‘마한축제’를 내년부터는 통합하여 ‘전라남도 축제’로 승격시키기로 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나주와 영암의 시장·군수가 만나 ‘마한’ 왕국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다는 것이다. 양 시장·군수는 상대지역 축제의 내빈으로 참석하여 이러한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그 의미를 배가시켰다. ‘마한축제’가 이제 전라남도의 ‘축제’를 넘어 경북의 ‘경주 Expo축제’, 충남의 ‘대백제 축제’와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대 축제의 하나로 발전하는 토대가 형성된 셈이다. 그 중심에 영암이 있다. 지난 7월 시종지역에 고대 왕국이 실존하였음을 확인해준 내동리 쌍무덤의 ‘금동관편’ 출토와 더불어 이번 마한축제의 도 축제로의 승격은, 고대 마한의 중심지 영암의 위상을 찾는 새로운 원년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축제의 방향성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마한의 정체성을 상징하면서도 단순한 과거의 복원이 아닌 현재와 미래가 결합된 새로운 마한축제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영암군민들의 역량이 하나로 결집될 때 더욱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추진단을 서둘러 구성하여 차분하면서도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최치원은 마한-고구려의 역사인식

지난 호에 백제 멸망기에도 마한의 정체성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살폈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에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으며, 마한은 고려요,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는 최치원의 글이 있다.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말하는데, 이를 통해 최치원의 역사인식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의 인식은 마한-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의 대응이었다. 그의 인식을 김부식도 “금마군, 본래 백제 금마저군(金馬渚郡)”이라 하여 역사·지리적 차원에서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였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 당에 유학을 간 신라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당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토황소격문’를 썼다고 하여 교과서에도 소개된 인물이다. 그는 귀국하여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도 알려져 있는 마한-백제의 역사인식을 대학자인 최치원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 그가 마한을 고구려로 연결을 시키고 있다. 최치원이 인식한 마한-고려의 역사인식은 당시, 곧 통일신라 시대에 형성된 인식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한-백제 인식이 언제 마한-고구려 인식으로 등장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인식이 형성된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는 평양 천도후 기자 조선이라는 관념을 형성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명에서는 여전히 기자 조선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 유민들 묘지명에서는 마한 인식보다는 오히려 진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마한-고구려의 인식이 등장한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의 시기로 볼 수 있다.

마한-고구려의 인식은 마한 견제 의도

‘一統三韓’, 삼한을 통일하였다는 인식을 가진 신라는 삼한과 삼국의 대응에 대한 정립이 필요했다. 삼한 중 가장 강성했던 세력은 마한이었고, 그 마한을 계승한 나라가 백제이고, 중국 사서에도 신라에게 복속된 백제를 여전히 ‘마한의 옛 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여전한 마한-백제의 역사인식 체계는 신라에게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672년 신라에 의해 백제 영역에서 축출되어 요동 일대로 옮긴 이후에도 웅진 도독부의 백제 관리들은 여전히 백제 땅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라는 일통에 대한 새로운 역사인식의 정립이 필요했으며 또한 웅진 도독부의 백제 관리들의 마한·백제와의 관계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백제 유민들에게 마한 역사계승 인식은 여전히 ‘마한의 옛 땅’으로 지칭되는 백제 땅으로의 회귀를 의미하였다. 이에 대해 신라는 기존 중국 측에서 인식하고 있던 마한-백제 인식이 아닌 새로운 마한-고구려 인식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신라에서 마한-고구려 인식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마한-금마저의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었다. 마한-금마저는 이미 삼국시대에 합의된 견해로 볼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은 670년 신라로 망명해온 고구려의 안승 집단을 금마저로 옮겨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금마저에 있던 고구려왕 안승의 세력은 삼한-삼국의 인식으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즉 신라는 일통삼한의 주요 구성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영역을 아우르지 못한 신라의 입장에서 금마저의 고구려 세력은 고구려를 계승한 一統의 주요 대상으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안승의 신라로의 투항과 그 세력을 금마저에 안치하고 고구려왕으로 책봉한 것은 신라 삼국통일의 완성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입장에서 진정한 일통삼한이었으며 마한=금마저=고구려의 등식을 만족시킨 것이었다.

신라는 마한으로 인식된 적이 없다. 백제는 마한의 옛 땅에서 성장한 국가로 인식되었다. 백제 멸망이후 백제의 지배층은 웅진 도독부의 백제 관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마한 세력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웅진 도독부가 백제 땅에서 축출됨으로써 마한의 정통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하였다. 이에 반해 마한영역의 일부에서 신라의 정치적 배려로 국가를 부흥시킨 안승의 고구려국은 금마저를 통해 마한의 정통으로 인식되었다. 어쩌면 신라가 안승세력을 옛 마한 땅인 금마저에 안치한 것 역시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와같이 신라가 마한-고구려의 인식을 재정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한·백제 지역에서는 여전히 마한 백제 의식이 강하게 뿌리 내려져 있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신라 말 견훤이 완산주에서 “내가 삼국의 시조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다.”라는 사실에서 마한 백제 인식이 여전히 이어져 내려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견훤은 마한이 성립한 후 진한·변한이 성립되었으며, 신라는 진한·변한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후고구려는 마한ㆍ압록-고구려의 역사인식

견훤은 금마저를 속군으로 둔 완산주에서 도읍을 선포하면서, 이곳의 금마산에서 백제가 개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금마산은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으로 이동해온 곳으로 인식되고 있는 곳이다. 이는 백제가 마한이 있던 금마산에 건국한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서 금마산을 매개로 마한 백제로 계승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이는 최치원의 마한 고구려 역사 계승인식과는 다른 흐름이 존재했음을 뜻한다.

곧 후삼국이 성립되던 신라 말까지도 여전히 마한 정통을 계승하려는 역사인식이 옛 마한 땅에 강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견훤은 이러한 역사인식을 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한 것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마한-금마저-고구려 대신 마한-압록-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 인식을 새롭게 만들어내게 된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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