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02>백제의 멸망과 마한 정체성(中)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조에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옛 백제 지역에 웅진·마한·동명 등 다섯 도독부를 설치하고, 이어 그 지방 수령으로 도독부 자사(刺史)를 삼았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서 신라에서 그 지역을 다 차지하여 웅주·전주·무주의 3주와 여러 군현을 설치하였다.”라 하여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백제 땅에 다섯 도독부를 설치하였음을 알려준다. 같은 책 백제 본기 의자왕 20년 조에는 웅진·마한·동명·금연(金漣)·덕안의 다섯 도독부를 두었다 하여 지리지에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도독부 이름이 금연과 덕안 임을 확인해준다.

이들 도독부가 원래 백제의 5방이 있는 곳에 설치된 것은 아닐까? 라고 추정할 수 있다. ‘周書’와 ‘北史’ 백제전에는 중방 고사성, 동방 득안성, 남방 구지하성, 서방 도선성, 북방 웅진성이라 하였는데, 이 가운데 북방의 웅진성과 동방의 득안성이 그대로 당의 도독부 명칭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3방은 도독부와 방의 명칭이 달라 5방이 있었던 곳과 다섯 도독부가 일치하는가에 대해서도 단정할 수 없다.

도독부 명칭, 고구려·마한 견제 의도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섯 도독부 대신 도독부 하나와 7개의 주 이름이 나온다. 처음 계획한 다섯 도독부 대신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하나의 도독부 체제로 전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웅진도독부 산하의 13현 가운데 득안현이 있는데, 덕안도독부가 도독부의 일개 현으로 강등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4개의 속현을 거느린 동명주가 있는데, 이 또한 동명 도독부가 격하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5도독부 체제를 1도독부 체제로 전환한 것은, 백제를 멸한 후 행정조직 정비를 통해 이 지역을 영속 지배하려는 당의 노력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백제 지역의 저항과 신라의 견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이 5도독부를 설치하고 다시 1도독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백제 멸망 후의 옛 마한 중심지인 영산 지중해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현재 다섯 도독부가 어디에 설치되었는지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긴 하나 차후 논의하기로 한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다섯 도독부의 명칭이다. 웅진도독부는 백제의 옛 서울이라는 점에서 쉽게 이해된다.

그렇지만 ‘동명’과 ‘마한’을 명칭으로 사용한 데서 정치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동명은 고구려와 백제 등 부여계에서 시조로 추앙하는 대상이다. 고구려와 경쟁하던 백제는 동명묘를 온조왕 때 모시는 등 부여족 정통계승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한성을 빼앗긴 후 동명묘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북부여가 5세기 말 멸망하자 북부여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남부여’ 국호가 나온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당이 ‘동명’을 도독부 명칭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구려를 공격하려는 당의 입장에서 충분히 고려되었을 것 같다.

그러면 마한을 도독부 명칭으로 사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7세기 백제의 마한 인식이 당의 백제 지배기구 명칭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마한과 대등한 통합을 이룬 백제 성왕이 부여족 계승의식을 강조하는 정책을 추진하다 마한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정국이 혼돈에 빠지자 무왕은 적극적으로 마한계를 포용하려 하였다. 익산으로의 천도를 추진하고, 심지어 마한의 건국설화인 무강왕 설화를 무왕의 탄생신화로 윤색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조에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웠다.”라는 내용과 무왕의 출생설화가 함께 수록된 사실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제껏 무강왕을 무왕으로 동일시하는 삼국유사 찬자의 견해를 따르는 경향이 많았으나, 이는 무왕이 마한의 시조 무강왕의 건국설화를 차용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별도로 살피는 것이 옳다.

중국, 백제가 마한을 계승했다

7세기에 나온 ‘周書’나 ‘北史’ 그리고 ‘舊唐書’ 백제전에 “예전 마한의 속국”이었으며 “마한의 옛 땅에 있었다.”라고 실려 있는 것도 이러한 인식의 반영이다. 또 다른 중국 사서인 ‘한원(翰苑)’에도 백제가 옛 마한 땅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7세기 중국에서는 마한을 한반도 남부의 중심 세력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마한에 대한 인식을 마한의 역사적 정통이 백제로 계승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왕의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오히려 백제가 마한의 정통을 이었다고 살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당에서는 당시 백제의 세력이 왕족인 부여계와 마한계로 양분된 것을 익히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여계보다 사실상 마한계가 백제의 정치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마한계에 대한 정책 방향이 백제 멸망이후 피정복지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당은 마한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한’이라는 도독부 명칭이 나온 배경이라 하겠다.

마한 도독부, 대방주로 격하되다

그러면 당이 마한 도독부를 설치하려 하였을 때 그 위치는 어디였을까? 혹자는 당이 설치한 노산주 영역이 아닐까? 라는 추정을 한다. 곧 지금의 전북지역이라는 것이다. 반면 백제사 연구의 권위자인 계명대 노중국 명예교수는 마한의 중심지였던 영산강유역으로 비정을 하고 있다. 필자 또한 마한 도독부는 영산강 유역설에 동의한다. 당이 ‘마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도독부를 설치하려 한 이유가 마한계에 대한 정복지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히 그 중심지인 영산 지중해 지역에 두어야 할 것이다. 실제 당이 설치한 7개의 주 가운데 노령 이남의 전남지역에 대방주와 분차주 2개가 있는 것도 이러한 관심의 반영이라 하겠다.

분차주는 보성 복내 지역에 주 치소가 있었고, 다시 복암리 지역에 대방주의 주 치소가 있었다. 시종과 반남·나주·다시 지역으로 三分되어 있던 영산 지중해의 마한 세력은 점차 복암리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가는 상황이었다. 당이 이곳에 치소를 둔 것은 당연하다.

이때 관심을 끄는 것은 주의 명칭을 ‘대방주’라 한 점이다. 대방주는 익히 알다시피, 漢 군현인 ‘대방군’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방군은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 있었던 한 군현으로 백제의 압박으로 사라졌다. 이 군현의 명칭을 굳이 지역적 연고도 전혀 없는 영산 지중해 지역의 통치조직 명칭으로 당이 차용하였을까? 7개 주 가운데 한 군현 명칭은 대방주 하나뿐이다. 이렇게 볼 때 대방주라는 명칭의 사용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짐작된다. 곧 이 지역에 강하게 뿌리내려져 있는 마한의 정체성을 누르기 위해 한 군현 명칭을 주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처음에 마한 도독부를 두려 한 정책에서 변화가 온 것이라 하겠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이 지역을 보다 확고하게 지배하고자 하는 당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이 지역의 강고한 마한 정체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