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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후에도 계속된 마한의 정체성■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01>백제의 멸망과 마한 정체성(上)
견훤왕릉과 부여융의 묘지석 통일신라 말 견훤은 마한의 정체성을 후백제를 건국할 때 이용하고 있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의 묘지석(사진 아래)은 백제 멸망 후에도 옛 마한 지역민들이 가지고 있는 마한의 정체성이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나주ㆍ영암 마한축제 하나로 통합돼야

오는 10월 12~13일 양일간에 걸쳐 시종 마한공원에서 마한축제가 열린다. 한국 고대사의 뿌리인 마한의 심장, 시종 일대에서 열리는 올해의 축제는 인근 쌍고분에서 신촌리 9호분 금동관과 동일한 금동관편이 출토되어 이곳이 고대 마한왕국의 중심지임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축제를 통해 고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한왕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성을 관광자원으로 연결하여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게 하는 전략 마련도 중요하다. 다만, 우승희 도의원도 도정질의에서 지적하였듯이, 축제가 나주와 영암에서 각기 별도로 추진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명량축제’처럼 속히 전라남도 축제로 승격되어야 한다.

얼마 전, 광주 모 단체에서 특강 요청이 들어왔다. ‘광주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것이다. 마한 관련 필자의 글을 읽으며 전라도 정신의 원형을 막연하나마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마한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전라도 정신’의 원형을 찾으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제 점점 그 해답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생각하는 전라도 정신은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개된 포용성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문화특질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독자적 정체성이다. 이를 기반으로 성립된 마한 연맹체는 분립적인 경향이 강하여 비록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미발달하였다고 하더라도, 백제와 대등한 단계에서 통합할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정체성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라에 정치적으로 복속된 뒤에도 그 정체성은 더욱 강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통일신라 말 견훤은 이러한 마한의 정체성을 후백제를 건국할 때 이용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때까지도 마한 정체성이 이 지역에서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견훤은 마한 계승의식을 강조했다

삼국사기 견훤전에 “견훤이 나라를 세울 때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州)의 백성들이 환영하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다.…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어야 하지 않겠는가?”라 하여, 견훤이 완산(전주)에서 나라를 세우게 된 배경이 나와 있다.

다분히 완산 주민들을 의식하는 발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견훤이 백제 계승의식을 분명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국의 시초를 마한에서 찾고, 마한의 중심지인 금마산에서 백제가 개국하였다고 한데서 마한역사 인식을 분명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이 마한에서 백제로 이어지는 역사 인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견훤 자신의 인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옛 마한 지역인 무진주·완산주 지역민들의 역사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마한 중심의 역사의식이 견훤 시기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이 지역에 마한 정체성이 뿌리내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한 정체성은 백제와 마한이 통합된 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마한 정체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면서까지 왕권을 확립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마한계의 강한 반발로 국호 변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를 시도하며 마한의 무강왕 건국 설화를 무왕의 탄생 설화로 윤색시키면서까지 마한계를 포용하려 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선덕여왕 때 신라에서는 백제를 마한의 별칭인 ‘응류’로 표현하게 하였다.

그러나 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마한계로 대표되는 지배세력을 억누르려는 정책을 썼다. 의자왕이 백여 명 이상의 귀족을 죽였다는 일본서기 기록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 여겨진다. 이에 대한 귀족 곧 마한계의 반발은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백제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백제 멸망 후에도 지속된 마한의 정체성

그런데 백제 멸망 당시에도 옛 마한 지역민들이 가지고 있는 마한 정체성은 여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의 묘지석을 통해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은 바로 붙잡혀서 왕 본인과 태자 융, 대신 88명, 백성 1만 2천명이 당에 끌려갔다. 의자왕은 바로 병사하여 북망산에 묻혔지만, 태자 융은 663년 백강 전투 때 당군과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융은 웅진도독에 임명되어 옛 백제 지역을 관할하는 책임을 맡았다. 당의 ‘이이제이’ 정책에 이용되었다. 융의 비는 역시 부흥운동을 하다 당에 건너가 당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던 흑치상지의 비와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부여융의 묘지석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公은 이름이 융(隆)이고 字도 隆으로,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에 드날렸다. (중략) 공의 정성이 천자에 계속 다다르자 포상이 거듭 내려졌으니, 마침내 그 지위는 卿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영광은 번국을 꿰뚫게 되었다. 그러나 마한에 남아 있던 무리들이 이리와 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고, 요해 바닷가에서 올빼미처럼 폭력을 펼쳤으며, 환산 지역에서 개미 떼처럼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에 황제가 크게 노하여 천자의 병사가 위엄을 발하였으니, 상장군은 지휘의 깃발을 옹위하였고, 정예의 중군은 군율을 받들었다. 이들을 병탄하는 꾀는 비록 조정의 계책에 따르는 것이지만 백성을 위무하는 방책은 사람의 덕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에 공을 웅진 도독으로 삼고 백제군공에 봉하였으며, 이어서 웅진도총관 겸 마한도안무대사로 삼았다. 공은 신의와 용감성을 일찍부터 길러왔고, 위엄과 포용력이 본디부터 충만하였으니, 읍락들을 불러 회유하매 흘린 것을 소중하게 줍듯이 하였고, 간악한 무리를 섬멸하매 뜨거운 물에 눈 녹듯이 하였다.”

부여융이 자신을 가리켜 백제 진조(辰朝)인이라 하였다. 여기서 진조는 삼한 이전에 있었던 진국을 말한다. 백제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신라를 견제하려는 당의 인식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마한에 남아 있던 무리들이 이리와 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고 요해 바닷가에서 올빼미처럼 폭력을 펼쳤으며 환산 지역에서 개미 떼처럼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에 황제가 크게 노하여 천자의 병사가 위엄을 발하였으니’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여기서 ‘마한에 남아 있던 무리들이 폭력을 펼쳤으며’ 라는 구절은 백제 부흥 운동을 말하는 것이고, ‘환산에서 개미 떼처럼 세력을 규합했다’라는 구절은 고구려 부흥 운동을 말한다.

그런데 백제 부흥운동을 가리켜 ‘마한에 남아 있던 무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부여융이 백제라 하지 않고 ‘마한’이라고 하는 까닭이 궁금하다. 혹자는 ‘마한’이 ‘백제’를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백제’ 대신에 ‘마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실제 옛 마한지역 주민들의 거부감이 컸을 가능성도 있다. 백제 패망의 책임이 있는 백제 왕실이 웅진도독이 되어 통치하려 하는 것에 대한 옛 마한 출신의 거부감이 매우 컸음을 말해준다. 결국,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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