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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에도 이어진 마한의 자존심, 영암■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00>마한의 심장, 영암

영암여고, 역사탐구대회서 우승하다

얼마 전, 전남대학교에서 전남교육청이 주최한 ‘제9회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가 열렸다. 치열한 예선을 거쳐 본선에 진출한 전남 중·고등학교 17개 팀이 각기 준비한 작품(보고서, 동영상)을 발표하였다.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는데, 어린 학생들이 준비하였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았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필자에게는 전남교육의 역동성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였다.

이날 대회에서 영암여자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최주하·강민우·김나영·최선화 등 4명이 출품한 ‘90여 년간 잊혀 있었던 영보촌 농민항일운동’이 최고상인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였다. 영암인도 잘 모르는 1930년대 초에 치열하게 전개된 영보 농민들의 항일운동을 다양한 자료를 이용하여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해내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어린 학생들의 잠재된  역량을 잘 이끈 지도교사 박미애 선생의 헌신적 노력이 돋보였다.
 
 

‘영암의 정체성’ 확립과 역사 찾기

영암여고 학생들은 필자가 지난 8월 29일 영암군청에서 발표한 ‘영암의병사 연구세미나’를 방청하였다. 그때 영암에서 처절하게 전개된 영암 의병들의 활동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럼과 충격을 받았는데, 이번 보고서 작성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내년 탐구대회에는 ‘영암의병’을 주제로 참여할 계획을 밝혔다. 이들의 역사의식 함양에 필자가 조금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하니 뿌듯함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이들의 작품이 대상작으로 선정되는 것을 보며 이것이 마한의 심장부로 오랫동안 작동된 영암지역의 역사성이 표출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하지만, 발표 학생들이 인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영암지역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영암지역은 우리 고대사의 원형이 형성된 마한의 심장부였으며, 이후 임진의병·한말의병·3·1운동·항일독립운동, 심지어 5·18민주화운동에 이르는 격변기의 중심에 있었다. 곡 역사의 주역이었던 셈이다. 이를 차분히 정리하여 ‘영암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가 본보에 연재 중인 ‘새로 쓰는 영산강유역 고대사’ 글이 100회를 맞았다. 변변치 않은 졸문(拙文)을 계속 연재해준 영암신문의 고마움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글을 읽고 의견을 주시는 애독자 여러분의 성원은 필자에게는 커다란 힘이다. 이들의 애향의식에 애틋함을 느끼고 있다. 필자의 글이 영암인의 자긍심을 발현시키는 작은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사실 영세하기 짝이 없는 문헌을 바탕으로 마한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글을 쓸 때마다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피나는 작업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빛나는 영암의 지역사를 밝힌다는 소명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다.

더욱 힘을 내어 영산 지중해의 영암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 고대사의 원형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하려 한다. 100회 기념으로 누차 강조하였던 영암의 고대사의 특징을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영암은 마한의 중심지였다

필자는 영암군청 홈페이지를 ‘마한의 심장부, 영암’으로 브랜드화 하면 어떨까? 라는 주장을 여러 차례 하였다. 단순히 ‘氣의 고장, 영암’과 그것이 갖는 의미는 비교되지 않는다. 역사는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서술될 때 비로소 생명력이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마한에서 변한·진한이 나오고, 백제가 나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원형’임을 말해준다.
경주 ‘대릉원’을 훨씬 능가하는 규모와 숫자를 자랑하는 영암 시종 대형고분들은, 이곳이 마한 중심지임을 웅변한다. 최근 발굴된 내동리 쌍무덤에서 출토된 나주 신촌리 9호분과 같은 형태의 금동관 조각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필자는 일찍이 시종지역에 형성된 연맹왕국이 영산지중해 마한왕국의 핵심이었음을 언급하였다.

지석묘의 밀집 분포지를 볼 때, 영암지역에는 덕진·신북·군서·서호·학산·미암면 일대가 또 다른 연맹왕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영암에는 시종천을 중심으로 하여 성장하여 반남지역 연맹체와 통합한 대국 ‘내비리국’과 영암천을 중심으로 나머지 지역을 아우르는 ‘일난국’이 있었다. 영암에 있는 마한왕국을 ‘월지국’으로 보기도 하나, 월지국은 현재 충남 천안지역의 ‘목지국’을 말하는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신연리 9호분을 비롯하여 태간리 전방 후원분·내동리 고분 등 현재까지 확인된 대형고분 15기 대부분이 ‘영산 지중해’에 연한 시종지역에 위치하여 있다. 반면 다른 영암지역에 있는 ‘일난국’ 규모를 밝혀줄 유적들은 찾아지지 않는다. 이는 ‘일난국’ 연맹체가 강진·해남반도에 자리 잡았던 마한 남부연맹의 대국 ‘침미다례’와 ‘내비리국’ 사이에 끼어 있어 큰 세력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암지역에는 ‘내비리국’이라는 대국과 ‘일난국’이라는 소국이 서로 경쟁 내지는 협조하면서 연맹을 유지하였다. 마한 54국 가운데 두 연맹왕국이 한 지역 내에 자리 잡은 것은, 이 지역이 정치·경제적으로 강성한 곳임을 말해준다.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영암 남쪽은 월남촌, 서쪽은 구림촌으로 신라 때 이름난 촌락이다.

이 지역은 서남해가 서로 맞닿는 곳이어서 신라에서 당으로 들어갈 때는, 모두 이 고을 바다에서 배로 출발하였다”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영암지역은 영산 지중해의 길목에 위치하여 물산의 유입이 빠르다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게다가 다른 내륙의 평야 지대와는 달리 하천 부유물과 퇴적물 유입이 증가함으로써 하상보다 높아져 조수(潮水)의 영향을 받지 않은 비옥한 노출 간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창의·융합적인 문화를 발전시킨 영암

이러한 경제기반을 토대로 낙랑과 왜 등 이웃 나라와 교류를 통해 융합된 창조적인 문화는 ‘영산강식 토기’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문화역량을 창출해 냈다. 가야와 왜의 특징을 융합시켜 새롭게 만들어진 옥야리 방대형고분의 토괴 구조는 다시 이웃 나라로 전파되었다. 이 지역의 주체적인 문화역량을 보여준다.

5세기 초 이 지역출신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왜에 건너가 일본의 고대사상 형성에 도움을 준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6세기 중엽 백제와 통합되었을 때 반남지역이 ‘현’으로 격하되었지만, 영암지역은 ‘월나군’이라 하여 ‘郡’이 설치된 것은 이 지역의 정치적 힘이 강력하였음을 알려준다. 월나군이었던 영암의 명칭이 ‘영암’으로 바뀌게 된 것은 경덕왕 때의 일이다.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월출산조에 ‘영암’ 명칭과 관련된 유래가 나와 있다. 즉, “월출산에 1,100명이 들려 해도 꼼짝 않은데 1명이 밀면 움직이고, 아무리 절벽 밑으로 밀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靈石’ 즉 신령스러운 바위라 일컫는 바위가 있다. 군 명칭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내용이다. ‘영암’ 이름이 ‘영석’의 ‘석’자를 같은 훈 ‘암’으로 바뀐 데서 유래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마한의 정체성, 통일신라 때도 이어져

그런데 경덕왕의 한화정책은 충북 길동군을 영동군으로 개명한 것처럼 지명을 한식(漢式)으로 바꾸거나 전남 보성처럼 중국의 지명을 차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암처럼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이 지역이 백제와 통합되고, 신라의 영향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지역에 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토착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통일신라 말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마한 중심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곳을 중심으로 장보고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여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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