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9>쌍봉사(雙峰寺)와 장보고(下)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화순군 이양면 증리 쌍봉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보물 제170호. 전체높이 1.4m. 현재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 ‘雙峯山澈鑒禪師塔碑銘’이라는 전액(篆額)이 새겨져 있다.

김헌창의 난으로 표출된 무주 지역의 반 신라 정서는 그 밑바탕에 마한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지역에 형성된 이러한 정서를 무마하기 위해 신라 중앙정부는 청해진을 설치했다.
하지만 청해진을 거점으로 무주인의 반 신라 정서가 폭발하자, 중앙정부는 청해진 세력을 김제 지역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썼다. 그럼에도 무주인의 반 신라 정서는 여전하였다. 이 지역에 형성된 오랜 마한의 정서와 관련이 있다 하겠다.

이 지역에 형성된 반 신라 정서 중심에는 장보고와 연결된 선종 사찰들이 있었다. 이들 선종 사찰의 구심점이 쌍봉사였다. 신라 중앙정부는 쌍봉사의 반 신라적 성격을 제어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인근에 있는 화엄사찰인 보림사를 선종사찰로 전환시키고 체징을 절에 주석하게 하고 적극적인 후원을 하였다. 대부분의 선종사찰이 지방호족의 후원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중앙정부의 집중적인 견제에도 불구하고 쌍봉사의 반 신라적인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쌍봉사 파견 도윤, 반신라 정서 순화 차원

이에 중앙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다. 다음 기록을 주목해 보자. 회창 7년(847) 4월에 (도윤 선사가)다시 청구로 돌아와 풍악에 머무르니 귀의하려는 이가 운무와 같이 모였고, 배우러 오기를 바라는 이가 별똥과 파도같이 몰려들었다. 이때 경문대왕이 귀의하여 받들고 은혜를 베풂이 날로 융숭하였다. 함통 9년(868) 4월 18일 갑자기 문인들에게 하직을 고하였다.(조당집17, 쌍봉화상)

쌍봉 화상 곧 도윤 선사가 귀국하여 풍악에 머물렀다고 하는 데서 금강산에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명성에 신도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이에 경문왕도 도윤 선사에게 귀의하였다는 것이다. 경문왕은 헌안왕을 이어 861년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경문왕이 도윤 선사에게 귀의한 것은 861년 이후부터 열반한 868년 사이에 쌍봉사에 주석한 것으로 보인다. 쌍봉사에 도윤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산에 주석하던 철감선사가 열반 무렵에는 쌍봉사에 주석하였음은 분명하다.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금강산 장담사에서 주석한 도윤이 멀리 떨어져 있는 무주 쌍봉사로 거처를 말년에 옮겼다는 것은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사찰이 장보고와 연계되어 있어 중앙정부로부터 집중 견제받고 있는 곳으로 국왕이 귀의한 승려가 거처를 옮겼다는 것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필시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을 법하다.

우선 생각되는 것은, 도윤과 쌍봉사의 인연이다. 그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영산 지중해의 나주 회진이나 영암 나루터를 이용하였다면, 인근의 쌍봉사에서 잠시 주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쌍봉사는 혜철 등이 귀국 길에 머물렀을 정도로 선승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보고의 후원을 받았던 쌍봉사는 승주지역의 박씨 집안이 또 다른 단월이었다.

이러한 점이 박씨(俗姓)인 도윤이 쌍봉사와 인연을 맺는 배경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일단 쌍봉사를 떠나 금강산에서 주석하던 도윤이 다시 쌍봉사에 오게된 데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반 신라적인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쌍봉사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 중앙정부가 인근의 보림사를 선종의 거점 사찰로 후원하였지만, 그러한 의도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한다. 가지산문을 통하여 쌍봉사를 제어하려 한 중앙정부의 의도가 쉽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신라 중앙정부는 쌍봉사를 직접적인 통제에 두려 했다고 보여진다. 김헌창의 난·장보고의 난으로 표출된 무진주 지역의 강고한 마한 계승의식을 어떻게든 약화시키고, 그 지역의 반신라 정서를 달랠 인물로 쌍봉사와 인연이 있는 도윤을 주목하고 쌍봉사에 파견하였던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그러나 도윤이 쌍봉사에 주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적하였기 때문에 실제 주석기간은 길지 않다. 따라서 신라 중앙정부의 의도는 뜻대로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이후에도 반 신라 정서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도윤 사후 쌍봉사에 제자들이 세운 부도와 비를 세운 것을 보면 도윤의 제자들이 꽤 있지 않을까 추정되지만, 활동기간이 짧기 때문에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고 보기 어렵다. 도윤의 수제자 절중(折中)의 언급은 이를 짐작케 한다.

“빈도는 이제 늙어서 쌍봉사에 가 친히 同學하던 사람들을 찾아보고 선사(도윤)의 탑에 面禮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에 남행을 주저할 수 없습니다.”

절중은 도윤을 도와 강원도 영월 흥녕사를 중심으로 사자산문을 개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선승이다. 영월 흥녕사에서 주석하던 절중이 쌍봉사를 찾아 스승의 탑비를 참배하겠다는 것이다. 절중이 ‘친히 同學’하던 사람을 찾겠다는 것이 주목된다. ‘친히 동학’이라 한 것으로 보아 아마 금강산에서 스승 도윤 밑에서 공부하던 제자를 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곧 그들 중 일부가 스승을 따라 쌍봉사에 내려와 주석을 하였던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그러다 보니 비록 도윤이 명성이 높고 쌍봉사와 일정 부분 인연이 있다 하여도 쌍봉사가 지닌 반 신라적인 정서를 완전히 바꾸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쌍봉사는 견훤의 도움을 받아 더 발전했다

쌍봉사의 오랜 단월로, 장보고와 더불어 승주 호족 박영규 집안이 주목된다. 박영규 가문이 쌍봉사의 단월이라는 데 학계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이전부터 승주지역 호족이 쌍봉사의 단월이었다. 그러다 청해진 설치 이후에는 장보고의 지원을 보다 많이 받았을 것이다. 장보고 세력이 무너진 후 쌍봉사의 세력기반은 이전보다 많이 약화되었을 것은 분명하지만, 승주 호족의 강력한 경제기반을 후원삼아 여전히 세력을 유지해나갔다고 본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의 끊임없는 견제를 버텨낼 수 있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마한의 강한 정체성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도윤의 제자 절중이 쌍봉사를 찾은 것도 혼란스런 신라의 다른 지역보다 안정되어 있어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본다.
 
보림사는 견훤의 견제를 받아 쇠락했다

쌍봉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 정부 시절 훨씬 많은 경제적 후원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쌍봉사는 무진주 지역에서 그 영향력을 더욱 키워갔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도 그 명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반면 신라 중앙정부의 많은 도움을 받았던 보림사는 후백제가 건국된 후, 도리어 쇠락의 길을 걸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가지산문 소속의 한 사찰일 뿐, 그 중심 도량으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쌍봉사의 견제가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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