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8>쌍봉사(雙峰寺)와 장보고(中)

장흥 보림사 쌍봉사가 장보고의 후원을 통해 성장했다면, 보림사는 왕실의 후원을 통해 성장했다. 쌍봉사는 장보고의 도움을 받고, 혜철과 같은 훌륭한 선승들이 있었음에도 산문(山門)을 형성하지 못했던 것은 장보고가 죽으면서 경제적 기반이 크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사진은 보림사 대적광전 및 3층 석탑과 국보 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아래 사진).

지난 7월말, 영암출신 우승희 도의원과 함께 목포의 한 케이블 방송에 출연하여 영산강 마한문화를 주제로 대담하였다. 필자는 ‘백제의 마한’이 아니라 ‘마한의 백제’라는 인식을 지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우승희 도의원 역시 새로운 관점에서 마한사를 보아야 하며, 그러한 인식을 지닌 연구자를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지극히 온당한 지적이다.

얼마 전 전남도청 ‘마한역사모임’ 공무원들과 나주 복암리 고분 전시관과 국립나주박물관을 찾았다. 예상대로 ‘마한’은 희미하고, ‘백제’는 뚜렷하였다. 마한유물을 발굴·조사·연구하는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기관의 현재 모습이다. 최근 나온 연구논문 역시, 아직도 ‘백제의 마한’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엊그제 나주문화원이 주관하는 ‘마한학’ 강좌에서 ‘영산지중해 마한’을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30대 초반 젊은이부터 70대 할머니에 이르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강의실을 꽉 채운 청중들이 강의에 집중하며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탐구적인 태도에 깊이 감동하였다. 이들 역시 ‘마한’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필자의 논리가 생경하게 들린 듯하였다. 특강 후에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노력이 한걸음, 한걸음 축적될 때 비로소 올바른 마한사가 정립되리라 믿는다.

북종선에서 남종선으로 변한 쌍봉사

 

동리산문을 열었던 도선의 스승 혜철스님이 중국에서 공부하고 839년(신문왕4) 귀국하며 잠시 쌍봉사에 머물렀다. 쌍봉사는 혜철스님 귀국 이전에 창건된 사찰이라 생각된다. 혜철이 그가 태어난 경주로 가지 않고 쌍봉사에 머무른 이유는 무려 25년간 중국에 머무른 관계로 경주에는 마땅한 후원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종 승려인 혜철로서는 교종 세력이 선종보다 강한 경주에서는 활동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혜철이 귀국하면서 주석의 대상으로 삼은 쌍봉사는 선종 사찰이었다.

신라에는 이미 통일 무렵 선종 계통의 불교가 유입되어 있었다. 중대 말 기록을 따르면, 혜공왕대에 이미 북종선이 전파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북종선은 세력이 약해져 지리산 기슭을 중심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남종선 계통의 선종이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북종선 중심의 선종에 변화가 나타났다. 혜철스님은 남종선 계통의 승려이다. 쌍봉사는 원래 북종선 계통의 선종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믿어진다. 쌍봉사가 선종과 관련되어 있어 혜철이 쉽게 그 절에 주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쌍봉사는 점차 남종선 계통의 사찰로 변모하였다. 혜철이 쌍봉사에서 주석할 때, 신이한 행적을 보였다. “무주 관내의 쌍봉(蘭若)에서 여름 결제 때, 날이 가물어 산이 마르고 매가 말랐으며, 비가 오지 않을 뿐 아니라 조각구름조차 없었다. 왕사(主司)가 선사에게 간절히 청하니 선사가 고요한 방에 들어가 좋은 향을 사르며 하늘과 땅에 빌었다, 잠시 후 단비가 조금씩 내려 무주 관내의 들을 적시더니, 얼마 후 큰 비가 내렸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쌍봉사에 승려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혜철이 그러한 일을 맡은 것은, 그가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고, 영향력도 있는 승려임을 알겠다. 그가 기도하니 비가 내렸다고 하는데서, 이 지역의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도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혜철이 쌍봉사에 머물고 있을 때, 절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장보고의 몰락, 산문을 형성하지 못했다

혜철이 쌍봉사를 주석의 대상으로 삼은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쌍봉사가 중국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도 작용하였을 법하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한 장보고는 무주 일대의 사찰들을 많이 후원하였다. 장보고는 중국을 왕래하는 선승들의 교통 편리를 도와주며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무주지역의 내륙 깊숙한 곡성 태안사의 단월도 장보고였다는 점에서 대체적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장보고가 선승들을 후원한 것은 이들을 자연스럽게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 운주사와 그리 멀지 않은 쌍봉사 또한, 장보고가 후원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혜철은 장보고 선단을 통해 중국의 새로운 선풍을 쉽게 접하고 있었다.

이렇게 장보고의 도움을 받고, 혜철과 같은 훌륭한 선승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쌍봉사는 산문(山門)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그 까닭이 궁금하다. 혜철스님이 쌍봉사를 떠난 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846년 무렵 태안사에 주석한다. 혜철이 쌍봉사를 떠났음을 말해준다. 혜철이 쌍봉사를 떠난 것은 장보고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쌍봉사는 장보고가 죽으면서 절의 경제적 기반이 크게 약해졌다. 쌍봉사는 장보고와 관련된 사찰이기 때문에 장보고 난 이후에 신라 중앙정부의 심한 견제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혜철이 쌍봉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교종계통의 화엄사찰이었던 장흥 보림사

이와 관련하여 쌍봉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장흥 보림사가 주목된다. 보림사는 가지산문을 연 대표적인 선종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 보림사는 759년 비(非) 의상계 화엄승려인 원표 대덕이 창건한 교종사찰이다. “원표 대덕이 법력으로써 정치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경덕왕이 특별히 명하여 장생표 기둥을 세우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장생표는 사격(寺格)을 정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시이다. 이는 국가의 재정지원이 뒤따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까운 지역에 성격이 다른 선종사찰과 교종사찰이 경쟁하고 있는 형상이다.

쌍봉사가 장보고라는 무주 호족세력의 후원을 통해 성장하였다면, 보림사는 왕실의 후원을 통해 성장한 셈이다. 장보고가 중앙 정부와의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곧 쌍봉사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보림사는 중앙정부의 많은 후원을 받으며 날로 세력이 커졌다. 당시 신라 불교는 선종 계통 불교의 도전이 거세게 나타나고 있어 교학의 재정립이 시도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보림사의 쌍봉사 견제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장보고 난에 무주인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장보고의 난에 마한인들의 정체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무주인들은 난이 실패한 이후에도 계속 정치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신라 중앙정부가 무주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해진을 혁파하고, 그 지역인들을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문성왕13년, 851)을 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이 지역의 불만을 더욱 강하게 표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문성왕은 사신을 보내 이들 지역을 위무하였다(855).

장보고와 연결된 선종사찰 견제

그런데 보조선사 체징이 859년 보림사에 주석하면서 보림사는 화엄종에서 선종사찰로 바뀌었다. 왕실 지원도 계속되었다. 왕실이나 중앙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보림사는 산문(가지산문)을 형성하였다. 선종 사찰로 바뀐 화엄종 사찰을 국가가 후원한 것은 아무래도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주 지역에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한 선종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쌍봉사가 비록 사세는 약해졌지만 계속 저항하고 있었으므로, 가지산문을 통해 쌍봉사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무진주 지역 불교 세력을 보림사를 통하여 통합하려 하였던 것이다. 보림사가 비록 쌍봉사와 같은 선종 계통 사찰이라 하더라도 화엄종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이 보림사에 조성돼 있는 것으로 볼 때, 여전히 화엄의 영향력이 온존하여 있었다고 본다.

또한, 왕실의 직속기구인 선교성에 보림사가 편입되어 왕실의 영향력은 여전하였다. 반면 쌍봉사는 반 신라적 성격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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