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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의병 역사’ 정립의 계기로

‘호남 의병’의 중심에 ‘영암 의병’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주 영암문화원 주관 ‘영암 의병 연구’ 세미나에서다. 이번 세미나는 박해현 초당대 교수와 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장이 주제 발표를 했다.

그동안 ‘영암 의병사’에 대해 지역출신 한두 명이 개별적으로 연구해 왔지만 학술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에는 미흡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이번 세미나에서 제기된 내용은 매우 의미 있는 연구 결과라 하겠다.

연구자료에 따르면 일찍이 ‘영암 의병’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영암 출신들이 국난극복에 몸을 던졌는데 도포출신 양달사가 조선시대 ‘최초 의병장’의 역사를 썼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거쳐 정유재란 때는 서호면의 전몽성·몽진 형제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어록 가운데 ‘약무호남시무국가’도 ‘호남 의병’의 역할을 강조한 대목인데 군서 연주현씨 문중과 오간 서찰에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 영암과의 깊은 인연을 짐작케 한다.

한말 때는 ‘영암 의병’의 역할이 더욱 빛을 발한다. 박평남 등 영암 의병들이 주도한 ‘호남창의소’(호남의소)는 함평출신 심남일 의병장과 함께 금정 국사봉에서 빛나는 전쟁을 이어갔다.

즉, 의병 전쟁이 독립전쟁으로 본격화될 때 ‘영암 의병’들이 기폭제 역할을 했는데 ‘호남의소’의 핵심 역할은 ‘영암 의병’이었다는 것이다.

또 금정면 국사봉은 남도 의병의 사령부였다. 즉 ‘호남의소’에 의병본부가 있었는데 이곳을 거점으로 남평·능주·보성·강진·장흥·해 남·나주·무안 등 전남중·남부 지역을 호남 의병들이 장악했다. 조선을 식민 지배하려는 일본의 계획이 차질을 빚었음은 물론이다. 실제, 일본군이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40일 일정으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의병들의 최후의 항전으로 보름간이나 연장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토벌작전 기간 의병들의 피해상황은 전사자 420명, 체포자(자수 포함) 1천687명 등으로 조사됐다.

‘영암 의병’은 단순히 영암출신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영암지역에서 활동한 모든 의병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암출신은 아니지만 영암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동한 의병들이 적지 않았는데 심남일·강무경 의병장이 대표적이다. 무주출신 강무경은 금정출신 양방매와 결혼, 부부 의병으로 활동했다. 양방매 여사는 뒤늦게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 되었다.

 

각종 자료를 토대로 확인된 한말 영암출신 의병은 190명에 이른 것으로 파악됐다.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한 의병장도 20명 남짓이나 된다. 한 지역에서 이처럼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지역은 없다고 연구자들은 이번 세미나에서 밝혔다. 영암출신 선열들이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영암 의병’이 ‘호남 의병’을 대표하고, ‘영암 의병’이 없었다면, ‘호남 의병’은 없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현재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이름을 올린 ‘영암 의병’은 겨우 50명이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또한 학술서적 어디에도 ‘영암 의병’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영암군지 등에 잠깐 언급됐을 뿐, ‘영암 의병’을 다룬 연구서 하나 없다고 한다. 의병장 심남일 활동지역에 ‘장흥·나주·영광·강진·남평·능주’는 있으나 ‘영암’은 없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주장이고 보면 우리가 자랑스런 의병 역사를 갖고서도 얼마나 소홀했는가를 짐작케한다.

그러면서 연구자들은 한말 의병 사령부였던 국사봉의 유적지 정화사업과 함께 본격적인 의병연구 작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금정면 소재 국사봉은 험준한 지세와 사방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여서 일찍부터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유격대 전남 제3지구 유치지구사령부가 주둔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빛나는 전투를 벌인 ‘영암 의병’들과 전남제일 의병장 심남일이 이곳에 사령부를 두고 청사(靑史)에 아로새긴 수많은 전공을 세워 한말 호남 의병의 전설로 남아 있는 곳이 국사봉이다. 하지만 국사봉이 갖고 있는 역사적 위치는 거의 조명되지 않고 있다. 농소·용천·사촌·이암, 고인동, 진터골, 칠성동 등의 국사봉의 전승지는 의병들의 활동상을 살피고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이므로 보전의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영암 의병’의 빛나는 의병 전쟁은 1919년 구림과 영암읍에서 일어난 3·1독립 만세운동, 영보항일 농민항쟁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영암을 ‘의향’(義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에 치닫고 있는 가운데 일찍이 선열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올곧음을 지향했던 ‘의향, 영암’의 역사를 지키는 일이 우리 후손들의 책무일 것이다.

영암신문  yasinm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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