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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사령부였던 국사봉 중심 영암 의병들 맹활약영암 의병사 ■ 들어가며 (1)
‘호남의소’ 결성해 구한말 의병 전쟁의 기폭제 역할
조선최초 의병장 양달사 이어 영암농민항일운동으로

남도의병의 지휘본부 국사봉

영암을 ‘의향’(義鄕)이라 일컫는다. 을묘왜변과 임진왜란 때 앞장서 의병을 일으켰다. ‘영암 의병’이 한말 의병 전쟁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으며, 그 대미(大尾)를 장식하였다. 국사봉은 남도 의병들의 지휘본부였다. 전남의 중·남부 일대에서 전개된 수많은 의병 전쟁의 중심에 ‘영암 의병’이 있다. 1908년 5월부터 1909년 9월 사이 영암지역에서 전개된 전투에 1천여 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수십 차례 전투를 벌여 120명이 전사하였다고 일본 기록에 나와 있다.

전투 인원의 30%가 희생되는 엄청난 혈전이 계속되었다. 쓰러져도, 쓰러져도, 일어나 일본군과 전쟁을 치렀다. 영암 전체가 의병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졌다. ‘의병의 성지(聖地), 영암’이라고 부르고 싶다. 찬란히 빛나는 ‘영암 의병’ 전통은 구림 3·1운동·영암농민 항일운동으로 계승·발전되었다.

그러나 현재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이름을 올린 ‘영암 의병’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학술 서적 어디에도 ‘영암 의병’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영암군지 등에 조금씩 언급될 뿐, ‘영암 의병’을 다룬 연구서 하나 없다. 의병장 심남일 활동지역에 ‘장흥·나주·영광·강진·남평·능주’는 있으나 ‘영암’은 없다.

‘영암 의병사 연구’는 ‘영암 의병’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라 하겠다. 조국의 독립을 지키다 산화한 ‘영암 의병’들을 ‘역사’에 소환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 정규군과 전쟁을 수행한 의병부대 ‘호남창의소’· ‘호남의소’가 영암 지역에서 결성되고, 금정 ‘국사봉’이 의병사령부임을 입증하였다. 의병 전쟁의 ‘시작·절정·대미’에 ‘영암 의병’이 있음을 밝혀냄으로써 ‘영암 의병’이 ‘호남 의병’의 구심점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이용하지 않은 당시 일본군 14연대가 작성한 ‘진중일지’를 활용하여 당시 의병들의 전투상황을 구체적으로 복원한 점은 본서의 가치를 높여준다.

‘호남창의소’를 주도한 영암의병

의병 전쟁의 중심에 ‘호남 의병’이 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만약 호남이 없다면, 이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하여 ‘호남 의병’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한말 호남 의병과 일본 군경의 교전 횟수·교전 의병 수는 1908년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 46.6%와 59.9%를 차지하였다.

호남 의병 중심에 ‘영암 의병’이 있다. 을묘왜변 때 의병을 일으킨 양달사는 조선 최초 의병장으로, ‘임진 의병’의 선구였다. 임진왜란 때 모병을 하러 영암에 들른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을 영암에 남겼다. ‘영암 의병’을 비롯한 영암인들의 인적·물적 도움을 받았기에 나온 말이다.

1895년 을미의병 때 의병을 조직하여 호남 의병의 기개를 보였던 영암 의병은 1907년 후기 의병(정미의병)때 호남 의병 전쟁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박평남 등 영암 의병장들이 주도하여 ‘호남창의소’를 조직하였다. 함평 출신 심남일 의병장은 ‘영암 의병’과 손잡고 ‘호남창의소’를 계승한 ‘호남의소’를 영암 국사봉에서 결성하였다. 국사봉 의병본부는 ‘호남의소’ 사령부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남평·능주·보성·강진·장흥·해남·나주·무안 등 전남 중·남부 지역을 호남 의병들이 장악하였다.

조선을 식민 지배하려는 일본의 계획이 차질을 빚음은 물론이다. 오로지 ‘호남의소’의 뛰어난 활약 때문이다.

‘호남의소’의 핵심은 ‘영암 의병’이다. ‘영암 의병’은 단순히 ‘영암 출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암지역에서 활동한 모든 의병을 포함한다. 영암출신은 아니지만 영암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동한 의병들이 적지 않다. 심남일·강무경 의병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당연히 ‘영암 의병’이다.

이제까지 한말 영암출신 의병은 187명에 이른다.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한 의병장도 17명 남짓이나 된다. 이들은 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고을은 없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추앙받는 양방매도 영암 금정 출신이다. ‘영암 의병’이 한말 ‘호남 의병’을 대표하고 있다. ‘영암 의병’이 없다면, ‘호남 의병’은 없다.

‘영암 의병’의 빛나는 의병 전쟁은 1919년 군서 구림과 영암읍에서 일어난 3·1 독립 만세운동, 덕진 영보항일 농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박해현·조복전>

박해현·조복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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