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7>쌍봉사(雙峰寺)와 장보고(上)

필자는 앞서 경주의 관광산업을 ‘안압지 야경’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영암은 어떨까? 7월 하순 무렵 휴가를 이용하여 영암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월출산 기찬랜드는 젊은 학생들에게 인기였다. 영암 터미널에서 광주행 버스가 만원이어서 다음 차를 기다릴 정도였다. 흐뭇하였다. 그러나 기찬랜드를 찾는 관광객들이 각기 다른 곳에서 준비한 먹거리를 가지고 한나절 쉬고 가버린다면, 영암의 지역경제에 과연 도움이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도시, 영암’의 콘텐츠가 필요하다

경주처럼 하루·이틀 밤 묵으며 쉬어가는 그러한 ‘영암’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암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잘 잡아야 한다. 영산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영암은 ‘마한의 심장부’임을 증명하는 시종 고분, 전승들이 쌓여 있는 ‘남한의 소금강 월출산’, 한말 의병사령부가 있었던 국사봉, 수많은 예술인 등 ‘과거와 현재’를 엮어낼 수 있는 인문학적 요소가 차고도 넘친다. 이를 어떻게 엮어낼 것인가. 이것은 오로지 지역민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 연구자로서 영암의 과거와 현대를 조금씩 살피고 있는 필자는 영암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힘’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대 마한에서부터 현대까지 오랜 역사에서 형성된 지역 고유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한의 심장, 영암’이라는 구호를 필자가 자꾸 외치는데, 이것은 상당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별도로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영암은 ‘의병의 성지’라 해도 크게 무리가 없는 곳이다. 이는 오래전에 지역에 형성된 ‘마한의 정체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믿는다. 마한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며칠 전, 광주의 모 단체에서 필자를 찾아왔다. 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필자의 ‘영산강 유역 마한사’ 글을 보며 어쩌면 ‘광주 정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특강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필자가 마한사를 연구하는 동기는 결국 우리가 막연히 이야기하는 ‘전라도 정신’의 실체를 밝혀보려는 데 있다. 처음에 막연히 가졌던 생각들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통해 하나씩 확인되고, 입증되는 과정에서 필자가 느낀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아 더욱 소명의식을 갖게 된다.
 
마한의 정체성 영암의 지역성에도 담겨

영산지중해의 마한은 다양한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러한 정신은 마한 연맹체들이 독자적인 왕국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마한’이라는 큰 연맹체의 틀 안에서 공통된 문화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항상 화합하는 ‘和而不同’의 정신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지역의 정서는 외침 등 국난극복과 불의에 저항하는 실천성이 어느 지역보다 앞서게 하였다. 나아가 개방적인 사고는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도 강한 지역적 특성으로 나타났다.
 
통일신라·고려 불교계 개혁 전남이 주도

통일신라 말 ‘교종’ 중심의 불교계에 새롭게 ‘선종’ 불교가 들어와 ‘9산선문’이라 하여 새로운 종파들이 나타난다. 이때 전남지역에서 곡성 태안사를 기반으로 ‘동리산문’, 장흥 보림사를 기반으로 ‘가지산문’ 등 두 개의 선종 종파가 성립되고 있다. 아홉 종파 가운데 두 개 종파가 전남지역에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새로운 불교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려 시대에도 무신정권 시대에 교종 중심의 불교계에 선종 중심의 불교계로 재편되는데 그 중심에 ‘수선결사’와 ‘백련결사’ 불교 결사단체가 있다. 이들 결사가 모두 전남지역에 있다. 이 또한 불교 개혁을 전남지역에서 앞장서고 있음을 말해준다. 결국, 전남지역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이러한 지역의 특성이 바로 마한시대에 나타났던 지역의 정체성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통일신라 시대에 선종 불교가 수용되고 정착되는 과정에 장보고가 일정부분 연관되어 있다. ‘완도’ 출신으로 알고 있던 장보고가 실은 ‘영암’ 출신인 가능성부터 시작하여 ‘장보고와 도선’ ‘장보고와 운주사’ 등 여러 주제로 나누어 장보고가 지역과 여러 면에서 특히 불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살폈다.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바로 앞서 살핀 김헌창 난의 결과로써 청해진이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김헌창의 난과 장보고가 관련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곧 무주인들이 지닌 정체성이 김헌창의 난에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장보고는 이러한 지역민들이 지닌 마한의 정체성을 이용하여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전남지역 여러 곳에 장보고와 관련된 역사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행히 그와 관련된 편린들이 남아 있어 여러가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전남지역 주요 사찰들의 단월(檀越), 곧 후원자였다. 그가 불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중국에 있는 ‘법화원’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포교당을 만들어 ‘엔닌’ 등 선승들을 후원하였다. 그가 ‘도선’과 관련되어 있고, ‘운주사’ 혜철 스님이 주석한 곡성 태안사의 단월이었다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운주사의 와불이 장보고 부부와 관련이 있다는 전승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쌍봉사의 단월이 장보고였다

화순 이양에 ‘쌍봉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다. 쌍봉사에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면 잘 아는 통일신라 시대 유명한 선승 철감선사 도윤의 ‘부도’(국보57호)가 있어 더욱 유명해졌다. 또한, 보물로 지정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사찰 건축양식인 3층 목조탑이 있어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끊임이 없는 곳이다. 필자 또한 대학 재학시절 지금 생각하면 큰 죄악을 지었는데, 국보로 지정된 부도에 먹물을 칠하며 탁본 연습을 하였던 기억이 있다.

필자 거실에는 3층 석탑을 중심으로 한 쌍봉사의 모습이 그려진 대형 그림이 걸려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다녔던 쌍봉 출신 미술학원 원장이 선물한 것이다. 지금은 복원되었지만 3층 석탑은 1984년 소실되어 보물 지정은 해제되었다. 쌍봉사가 있는 ‘쌍봉’ 지역은 1906년 양회일·이백래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연합의병부대 ‘호남창의소’ 본부가 있었다. 영암에 있는 ‘호남창의소’와는 별개이다. 지금 그곳에는 당시 의병들이 진지를 구축한 흔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절이 장보고와 관련이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이 문제를 살펴보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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