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병장 전몽성과 형제들<2>
선조 때 무과 급제, 임진왜란 의병들과 함께 큰 공 세워

장동사

(3)전몽성(全夢星 1561~1597)
 
임진왜란 때 아우 몽진과 창의(倡義)

전몽성은 자(字)가 응상(應祥)으로 공조판서 사민(工曹判書 思敏)의 8대손으로서 감찰 윤(監察 倫)의 손자요, 첨중추 방필(僉中樞 邦弼)의 둘째 아들로 1561년(명종17년 辛酉年) 영암군 서호면 엄길에서 태어났다, 몽일(夢日) 몽진(夢辰) 몽태(夢台)를 형제로 두어 우애가 돈독했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공(公)은 골상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팔의 힘이 무척 세어 또래 중에서 뛰어났고, 활 삼백 근에 화살을 끼워 능히 쏘았다. 일찍이 글을 좋아하여 문예(文藝)가 뛰어났다. 그러나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다가 드디어 붓을 던지고 무예(武藝)에 열중하여 1583년(선조16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이를 축하하는 연회를 베푸는 날, 공은 홀로 침실에 들어가 한숨을 지으며 눈물짓고 있었다. 아우가 이상히 여겨 공에게 물으니 “남아(男兒)가 한번 나라의 은혜를 받으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하거늘, 이로부터 내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울게 되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은 다음 해 1584년(선조17년) 북도(北道)를 방위하기 위해 나아갔다. 공을 만난 병사 신립(兵使 申砬)은 “그는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며, 그의 막하(幕下)에 머물게 하여 매양 일을 같이 의논하였다. 공은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 군기사주부(軍器寺主簿)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이 서로 함께 창의(倡義)하였다. 공은 막내아우 몽태(夢台)와 울면서 작별하여 말하기를 “너는 어머니를 모시고 조심해서 피난하여라. 나는 이미 몸을 나라에 맡기었으니 마땅히 임금을 위해 죽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아우 몽진(夢辰)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
 
이성 현감 직 고사, 고향서 아버지 봉양

공은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휘하에 나아가 금산(錦山)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전투가 실패하게 되자 “주상이 계시는데 함부로 죽는 것은 무익한 짓을 할 뿐이다.”라고 말하며 일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의 길을 택해, 화살을 맞으면서 말을 몰아 타고 포위망을 뚫고 수십리를 달렸다. 갑옷을 풀어보니 몸에는 여섯 군데나 상처를 입었으며 왜적의 칼날에 말꼬리도 끊기었다. 

공은 바로 조헌(趙憲)의 휘하에 나아가 독전하였다. 그러나 조공(趙公)이 순절(殉節)하자 다시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용천(龍川) 행재소(行在所)로 가는 길에 그때의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이 전공(全公)의 이름을 듣고 불러서 편비장(褊裨將)으로 삼았다. 남평(南平), 구례(求禮)의 두 원과 별장(別將) 남응길(南應吉)과 더불어 진산 조림원(珍山 照臨院)을 수비하였다.
 
왜적이 물러나자 드디어 행재소(行在所)로 갔다. 선조대왕의 가상히 여기신 하교를 받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93년(선조26년)에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제수되었다. 함평현감 때는 청렴하고 근엄한 현감으로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후 1596년(선조29년) 이성현감(利城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아버지가 노쇠하므로 면해줄 것을 청원하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정유재란 때 율치재서 왜적 수백명 섬멸

1597년(선조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막내아우 몽태(夢台)에게 말하기를 “내가 늙은 아버지께 차마 작별인사를 할 수 없으니 네가 잘 여쭈어서 아버지의 생각을 너그러이 해야 할 것이다.”라 하고 동생 몽진(夢辰)과 더불어 전 첨사 유장춘(前 僉使 柳長春), 생원 서희서(生員 徐希恕), 사인 김덕흡(士人 金德洽), 김덕란(金德鸞), 박문립(朴文立), 서건(徐鍵) 등과 함께 정예 수백 명을 모집하여 영암과 강진의 경계인 율치(栗峙 밤재)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적을 격파하여 수백 명을 죽였다. 이로 인해 영암, 강진 두 고을이 안정케 되었다.

공은 다시 장정을 모집하니 군세가 크게 떨치었다. 여러 의사(義士)들은 공을 대장(大將)으로 추대하고, 유장춘(柳長春) 박문립(朴文立)을 좌우 부장(左右 副將)으로 삼았다. 이에 공은 여러 군중에게 맹세하기를 “주상(主上)이 몽진하고 계시므로 가서 문안함이 시급하니 마땅히 갑옷을 단속하여 서울로 올라가 왕사(王師)에 소속되어야 하겠다.”라고 말하고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적병이 사방을 둘러싸서 길이 막히므로 군중이 말하기를 “앞길은 왜적의 세력이 더욱 더해지고 우리는 외롭게 되어 실로 돌파하기가 어려우므로 잘 안병(按兵)하여 대세를 바라보면서 때를 기다려 근왕(勤王)하는 것이 득계(得計)일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월출산(月出山) 요해처(要害處)에 의거했다. 

이 무렵 왜적은 바깥 바다에서 연해의 여러 고을에 침입하여 목포(木浦)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와 영암 은적산 뒤 해암포(海巖浦-지금의 石浦)에 진을 치고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때마침 통제사 이순신 장군(統制使 李舜臣 將軍)이 우수영(右水營)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치게 되자(1597년 9월 16일) 공의 의병진중(義兵陣中)에 편지를 보내와 목포 일대의 바다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도록 요청하였다.

그때 영암 서쪽 해암포(海巖浦-지금 石浦)에 왜선 수십 척이 머물러 있었으므로 즉시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군을 십대(十隊)로 나누어 각 대(隊)마다 영장(領將)을 두었다. 그리고 칼을 잡고 명령하기를 “장부가 나라를 위해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라”하니 병사들이 모두 분발하여 명령대로 따랐다. 드디어 군사를 정비하여 나아가 노략질하는 왜적을 격파하니 매우 두려워하여 다시는 산길로 내려와 마을에서 노략질하지 못하였다.

왜적과 싸우다 37세 때 동생 몽진과 순절

1597년 9월 24일 유점동(鍮店洞)에 나아가 머물면서 골짜기 어귀에서 왜적을 맞아 치려고 하는데, 조금 뒤 왜적 4~5백명이 포구(浦口) 위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이에 대장 전몽성(大將 全夢星)이 말하기를 “오늘 일로 발길을 돌려서는 안 된다. 만일 명령을 어기면 베일 것이다.” 하고 군사를 나누어 산을 향해 진을 치고, 또한 노약자와 피란자 등으로 하여금 수풀 사이를 들락날락하게 하면서 군인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왜적의 수백 보 밖에서 한 일자(一字)로 길게 줄지어 기러기 떼처럼 나아가면서 몸을 바쳐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에 따라 사기가 떨치게 되고 왜적의 사망자는 반수가 넘었으나 우리 군사에는 죽은 이가 겨우 5명이었다. 왜적은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다음날(1597년 9월 25일) 왜적은 다시 큰 떼를 이끌고 산을 빙 둘러싸면서 나타났다. 대포 소리가 진동하고 화살과 총탄이 비 오듯 했다. 대장 전몽성(大將 全夢星)은 천천히 군중을 향해 말하기를 “사람은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지금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으면 또한 장쾌한 일이 아닌가”라고 외쳤다.

이윽고 전몽성 대장(全夢星 大將)은 한 사람에게 시켜 화살을 가져오게 하여, 나무를 의지하고 왜적을 향해 쏘니 쏠 때마다 맞지 아니함이 없었다.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왜적의 일대대(一大隊)가 산 뒤쪽에서 연이어 나와 사방을 둘러싸고 공격해오니 아우 전몽진(全夢辰)이 먼저 탄환에 맞아 순절(殉節)했으며, 좌우가 궤란되어 서로 흩어져 버렸다. 다만 유장춘(柳長春) 김덕란(金德鸞)과 더불어 꿋꿋하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왜적의 칼을 무릅쓰고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이 다 하고 활줄이 끊어져 버렸다.

대장 전몽성(大將 全夢星)은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나라를 위해 적에게 죽게 되었으니 신자(臣子)의 도리는 다 했으나 늙으신 어머니를 두고 이내 몸이 먼저 죽으니 이 불효를 어떻게 하겠느냐”라 하고 드디어 칼을 빼어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 가서 6~7명의 왜적을 베어 죽였으며, 필경에는 적의 어지러운 칼에 순절하고 말았다. 때는 정유년, 1597년 9월 25일이었다. 공의 나이 혈기왕성한 37세이었다.

숙종 때 병조참의 추증 장동사우 건립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민(士民)은 전몽성 대장의 순절 소식을 듣고, 모두 짊어진 짐을 내던지고 엎드려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제 모두 죽었다”라고 하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판을 울렸으며 연일 끊이지 않았다. 장례는 호산 해좌원(虎山 亥坐院)에서 지냈다. 장삿날 기나긴 무지개가 생겨 영역(螢域)을 걸치어 날이 다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충의에 감동되어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였다.

공(公)은 어릴 때부터 글을 읽다가 옛 사람들이 절의(節義)에 순절(殉節)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반드시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고, 구차히 살기를 꾀한 자를 보면 반드시 분격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금산(錦山) 싸움을 겪고부터는 항상 무기를 몸에 지녔으며 매양 나라를 보위하고 죽기를 맹세하는 뜻을 가졌다. 또한 늙은 어머니가 계시면 충의를 다 하기가 어려우며 효자로서 순국함이 효도를 다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음미해 보면 충효의 정신이 충만해 있음을 가늠하게 한다.
 
그 뒤 많은 향유(鄕儒)의 발론(發論)에 따라 도백(道伯)이 공(公)의 공적을 조정에 상달하니, 숙종(肅宗)께서 이르기를, “전몽성(全夢星)은 국난(國難)에 임하여 절의(節義)를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며 「임린항의위국연생(臨亂抗義爲國捐生:전란에 다다라 의로서 항거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라는 상계서 여덟 자를 내리고,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하며 사우(祠宇)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1677년(숙종3년)에 영암 장동(靈巖 長洞)에 사우(祠宇)를 세워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가 공(公)의 행적을 짓고 장동사(長洞祠)에 배향하였다. 1887년(고종24년)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하고 충효(忠孝)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공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호남 유림의 건의에 의해 1924년 충효문 옆 뜰에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비문은 송환기(宋煥箕)가 찬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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