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전 광주 서광초등학교 교장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담양에서 순창까지 이어지는 메타세쿼이아 초록빛 동굴을 통해 금과골프장을 달렸다. 자식들의 권유로 늦은 나이에 골프를 시작하여 5월에는 머리를 올리고,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오르듯 이곳 필드로 학습의 장을 옮기게 되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두 시간 골프연습을 마치고 차에 오르려는데 장남이 음료수를 권했다. 삼복더위라 한층 시원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언성을 높였다. “세상에 너는 일본산 음료수도 모르냐? 나는 일본 음료수를 마시지 않는다.”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얼른 휴대폰을 열어 일본산 불매 제품들을 찾아보았다. 화장품을 비롯해서 음료수, 맥주, 신발, 가전제품, 시계, 자동차 등 평소에 몰랐던 제품들을 알고 나서 깜짝 놀랐다. 하찮은 낚시 바늘, 물고기 떡밥까지도 일본산에 훨씬 많은 고기들이 집어(集魚)되어 나도 일본산을 즐겨 썼던 터이라 아내 말이 뜨끔했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겠군.’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36년간 우리 민족을 그만큼 업신여기며 잔인하게 지배했던 그들, 우리 민족과는 철천지원수들이 아닌가?

엊그제 일본은 우리나라를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고 경제전쟁을 도발했다. 아베는 우리를 일깨웠다.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우리도 이젠 당하고만 살 수 없다. 뭉치고 단결하면 산다.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침을 받고서도 굳건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일본의 백색국가에서 우리나라가 제외되면 1천개가 넘는 제품들의 수입이 일일이 규제받으며 곤란을 겪게 된다고 한다. 100년이 넘는 노하우를 자랑하는 자동차엔진 일부부품을 일본제품에 의존하고 있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한편, 일본의 폐 석탄을 수입해 시멘트를 만들고 우리 폐기물은 땅에 묻는다니 이 정도면 코미디 수준이다. 전범국가 일본은 첨단소재를 수출하고, 우리나라는 방사능 가득 찬 쓰레기를 수입하는 현실이 너무 서글프다. 우리가 폐 석탄을 수입하지 않으면 일본은 폐기물 대란이 일어난다니 즉각 폐기물 수입을 제한하여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정치권에서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북한 팔이 하다가 이젠 일본 팔이’ 한다면서 대안 없는 맹비난을 일삼거나 이번 일본과의 경제전쟁 사태가 총선에 자기 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망언들, 나라가 이런 위급한 처지인데도 당리당략이라니 한심할 노릇이다. 

지난 주 본지에서 S중학생들이 일본 탐방여행을 떠났다는 어이없는 기사를 읽었다. ‘역사를 잊는 민족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후손들에게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고, 일본의 만행을 정확히 교육하여 나라의 힘을 기르도록 기술을 익히고 일본의 의존도를 낮추는 노력에 온 국민이 힘을 합쳐야할 때이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어리석은 나라가 아닌가? 일본 물건은 사지도 말고, 쓰지도 말아야 한다. 일본 여행객이 30%가 줄었다는데, 70%는 아직도 여행을 간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당분간 일본여행도 자제하고 우리도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해야 한다.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정책)도 파기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런 판국에 무슨 안보 공조란 말인가? 북한의 핵무기가 두려워 고급 군사정보는 얻고 싶다니,

최민우(20세, 제일교포 2세) 학생은 하버드 대학에서 아베가 연설한 후, 그와 1대1 돌직구 토론에서 당당히 말해 그가 진땀을 흘린 일화가 회자되고 있다. “수천 명의 한국여성을 성노예로 삼는 일을 정부가 관여했는데, 왜 사실을 부인하죠? 정부는 왜 위안부에 대해 사과하지 않습니까?” 나라도 못한 일을 해줘 고맙고, 소신과 신념,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의향의 보성군 곳곳에 1일 아침 ‘일본제품 불매운동’ 현수막이 100여개가 동시에 걸려 진풍경을 연출했단다. 각종 사회단체와 읍·면민이 자발적으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에 나선 것이다. 7일에는 호남에서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이 펼쳐졌던 벌교읍 일대에서 결의를 다지는 시가 퍼레이드가 열린단다. 선조들이 의병으로 민족과 이웃을 위해 전쟁터에 나갔다면, 이제 후손들이 그 정신을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할 차례라고 생각해 불매운동에 동참하자며 실천으로 이어가겠다고 의지를 피력했단다.

우리 영암군의 독립유공자로 문○○외 13명, 작년 11월, 제79주년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신○○외 5명이 영암농민항일운동 관련자로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되니 영암사람으로 긍지를 갖게 하였다. 영보 형제봉사건은 영암의 청년회원과 농민들이 1932년 5월 1일 덕진면 영보정에서 메이데이를 기념하여 항일만세운동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그해 6월 4일(음력 5월1일) 영보리 형제봉에 수십 명이 모여 소작권 이전을 반대하는 결의를 하고, 마을로 내려와 소작인을 응징하고 항일만세 시위를 하다가 73명이 체포되었던 사건이다. 당시 시위대인 우리 선조들은 “일본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 놓아라.” “일본인들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고 총칼 앞에서 굽히지 않고 목숨을 내걸고 외쳤다. 지금 이 판국에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우리 정부가 일본의 만행에 맞대응하기로 한 만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실천하여 이 위기상황을 극복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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