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온 나라가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영암교육지원청의 부적절한 행정이 도마에 올랐다. ‘영암 중학생 해외역사문화탐방’ 행사를 일부 학생과 학부모들의 강한 이의제기도 불구하고 강행한 탓이다. 물론 예정된 행사를 취소하는데 시일이 촉박하여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영암교육지원청과 학교 측은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경제 제재 조치에 따른 일본산 제품의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청와대 게시판에 일본 전 지역을 여행 경보지역으로 지정해달라는 청원이 이미 7월초에 올라왔었다는 점에서 발 빠른 대응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 탐방행사를 보름이상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을 다소 늦추더라도 사태추이를 봐가면서 행사를 추진했더라면 보다 현명한 대처방법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얘기다.  

그리고 일본탐방을 원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참여를 유도하는 비교육적인 처사는 교육당국으로선 있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 학생들의 단체활동은 지식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도 있겠지만 학생 개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며 교묘한 방법으로 일본탐방을 강요한 행위는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우리 영암은 일찍이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이 활발한 고장이었다. 을묘왜변 때를 거슬러 올라가 관군이 왜구의 침입에 대적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도포의 양달사 형제는 영암읍성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구를 격퇴시켜 국란을 평정했다. 임진왜란 때는 서호의 전몽성·몽진 형제가 고경명 장군 휘하에서 활약하다 순국했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금정 국사봉을 중심으로 호남의병들이 가장 최후까지 일본에 항전했는데 당시 금정출신 양방매는 강무경의 아내로 남편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3·1운동 때는 1천여 명의 군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들 중 30여명이 징역을 살거나 태형을 받았다. 1930년대 초에는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은 영암농민항쟁이 영보 형제봉에서 일어나 70여명이 법정에 서기도 했다. 월출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이러한 영암 사람들의 기개는 1980년 5·18민주항쟁 때도 이어져 의절의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처럼 의향(義鄕)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영암에서 일본의 ‘경제 보복’을 규탄하며 전국에서 일본제품 불매 운동과 함께 일본여행을 자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일본 탐방행사를 강행한 영암교육지원청의 신중치 못한 행정은 군민들의 비난을 받아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