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5>김헌창의 난과 마한 정체성 표출(中)

필자는 이번 휴가기간 경주를 다녀왔다. 밀린 원고 때문에 노트북과 여러 박스의 책을 들고 이동한 탓으로 가족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주를 휴가지로 선택한 까닭은 국회에서 마한특별법 제정 논의와 관련하여 가야·신라의 역사를 간직한 그곳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현재 그 지역의 유적지 보존실태가 어떠한지를 살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마한특별법 제정에 모든 역량 집중해야
김해가 지역구인 여당 국회의원이 마한을 제외한 신라·고구려·백제·가야사 연구 특별법안을 제출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한 바 있다. 경남도의회 차원에서는 ‘가야사 연구복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촉구 대정부 건의안’을 지난 7월 19일 채택하여 국회의원의 입법활동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런데 경주에 와서 보니, 그곳이 지역구인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하고 130명 넘는 국회의원이 서명한 ‘신라왕경특별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었다. 이렇게 마한·가야·신라 등 모든 고대국가가 자리 잡고 있는 지역에서 각기 특별법을 제정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특별법의 홍수사태가 초래될 것은 명약관화다. 그러다보면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 특별법이 제정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한특별법은 그동안 망각의 기억에 있는 한국 고대사를 밝혀 역사적 진실을 찾는 기초 작업임과 동시에 나아가 지역 균형발전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제정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역사자원 관광자원화 전략은 매우 중요하다

이번 경주 답사는 역사적 자원을 관광자원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확인시켜주는 기회도 되었다. 경주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안압지와 임해전 야간경관’이 있다. 안압지는 신라 왕궁인 월성 바로 앞에 있는 인공연못이고, 임해전은 안압지 안에 있는 누각인데, 신라 귀족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1978년 필자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아직 발굴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아 황량한 논밭이었다.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남아 있는 안압지터를 발굴하였더니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다. 그 출토유물은 현재 경주박물관에 별도의 부속건물을 신축하여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안압지 유적을 인공연못·기화요초·임해전 등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그곳에 조명시설까지 하였다. 연못에 비춰지는 소나무와 전각의 화려한 모습은 마치 신선세계에 오는 듯하였다.

예전에 경주하면 ‘불국사’ ‘석굴암’이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안압지 야경’이 화려한 모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야경을 보기 위해 월요일 밤 8시 30분 쯤 안압지에 도착하였는데 주차장은 만석이었다. 200m 떨어진 황룡사 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황룡사 주차장에서 안압지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인파의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안압지에 들어가기 위해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로 입구는 인산인해였다. 매표소 입구에서 네 줄로 줄을 세우고 발권을 하였지만, 30분 넘게 걸렸다. 하룻밤 수만 명은 족히 모인듯하였다. 바로 역사자원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는 실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필자의 뇌리에 영암 시종지역에 마한역사공원을 조성하고, 마한의 주요 유적지를 복원하여 영산 르네상스를 부활시키는 것이 지역개발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경주 대릉원 보다 훨씬 많은 대형 고분이 소재하고 있는 영암은 경주의 이러한 모습에서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주 전라남도 공무원들로 구성된 마한역사연구회원들과 자문교수 자격으로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국립나주박물관을 찾았다. 최근 시종의 쌍무덤 발굴에서도 확인하였지만, 지금도 땅을 파면 고대 마한의 유적·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살피면 마한왕국의 실체를 확인하는 많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주박물관 등의 설명들이 아직도 백제의 마한 관점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필자의 얘기가 본론과 많이 벗어났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살필 때 그 이면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점에서 마한사를 그리고 영암의 역사를 사랑하는 역사학자의 넋두리로 받아주었으면 한다.
  
김헌창의 난은 권력 독점에 대한 불만 표출

김헌창이 반란을 꾀하였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난 호에 언급한 바처럼 그것이 난을 일으킨 요인의 전부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김헌창의 난에 신라 아홉 주 가운데 다섯 주, 다섯 소경(小京) 가운데 세 소경이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헌창의 난이 당시 신라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이다.

김헌창은 그의 부친인 김주원이 김경신(원성왕)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패배한 까닭으로 중앙정부에서 철저하게 견제를 받고 있었다. 원성왕계가 김주원계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김헌창이 시중 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웅천주 도독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이미 무진주 도독 1년 8개월, 청주도독 5년 4개월 등 모두 7년을 지방장관으로 보냈다. 지금 같으면 국무총리 직에 해당하는 시중을 역임한 인물을 장기간 지방관으로 발령을 낸 사실은 김헌창에 대한 견제가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사에 대한 불만은 김헌창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헌덕왕 3형제를 중심으로 고착화되면서 권력에서 소외된 세력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특정세력의 권력독점은 같은 중앙귀족 내부에서 그리고 중앙과 지방권력과의 세력 다툼으로 나타났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켰을 당시 도독으로 있었던 웅천주는 백제의 옛 서울 공주지역으로 옛 백제계 유민들의 정체성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이 무렵에 옛 마한·백제 지역에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심해져 초적이 들끓고 심지어 아이를 내다파는 등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지역민들의 불만이 폭발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말하자면 재해로 인한 불안은 진표율사가 백제인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밑바탕에 잠재되어 있던 망국인으로 지녔던 근본적 불만을 표출시키는 동인(動因)이 되었던 것이다. 김헌창은 이를 익히 알고 있었다.
 
김헌창의 난, 지역 이해관계 차이 드러내

그런데 김헌창의 난에 대응하는 9주 5소경의 대응 태도를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김헌창이 도독으로 있던 웅천주를 거점으로 무진, 완산, 청, 사벌 4주 및 국원, 서원, 금관의 3소경은 직접 난에 가담한 지역이다. 반면 한산, 우두, 삽량주와 북원소경 지역은 난에 동참하지 않은 곳이다. 이 지역은 난이 일어날 것을 ‘先知(미리 알고)’하여 군사를 일으켜 관할지역을 지켰다 한다. ‘미리 알고’의 표현으로 보아 이들 지역은 김헌창으로부터 난에 동참할 것을 미리 제의 받았으나 그것을 거절하고 중립적인 처지에 있었다.

나머지 김주원이 물러나 있던 명주와 남원소경의 입장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요컨대 김헌창의 난은 대부분 지방세력이 가담한 중앙과 지방간의 세력싸움으로 해석이 되나 같은 지방세력 내부에서 입장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다음호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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