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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정체성은 통일신라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4>김헌창의 난과 마한 정체성 표출(上)

엊그제 필자와 같이 근무하고 있는 교수님과 통화할 일이 있었다. 고대사 전공으로 최근 백제 관련 글을 많이 쓰고 계신다. 필자 때문에 마한사에 대한 관심도 점차 갖기 시작하여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교수님 역시 4~5세기 백제의 정치 상황으로 볼 때, 영산강 지역을 백제가 지배하였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황해도 지역을 상실한 백제 아신왕 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자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가 과연 마한 남부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겠는가? 비옥한 영산강 곡창지역을 장악하였다면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이 심각한 상황이 되도록 방치하였을 것인가 등의 문제가 남게 된다.
 
침미다례 공격으로 백제가 타격을 받았다
4세기 후반에 있은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공격은 단 한 차례의 공격으로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필자의 견해에 같은 고대사 교수님도 동의해주어 힘이 솟았다. 이를테면, 백제가 크게 이긴 전투가 아니라 오히려 심대한 타격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백제가 침미다례를 ‘남만’이라 하여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는데서 그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마한역사 해석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토착성과 개방성이 어우러진 마한문화 특질
필자는 늘 ‘전라도 정신’의 실체에 대해 궁금함을 가지고 있다. 그 뿌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이 바로 ‘마한’이었던 것이다. 고유의 토착성에 다양한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결합하여 ‘영산강식 토기’로 대변되는 창조적이고 융합적인 ‘마한’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믿어진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 지역의 정치체들이 독립왕국을 7,80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의 정체성이 자연스레 뿌리내렸다고 여겨진다.

왕인박사의 후예인 ‘行基’스님이 왕인이 도래한 지 수 세기가 흘렀음에도 ‘백제계’ 아니 ‘마한계’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나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법상종을 개창한 유명한 진표율사가 백제가 멸망한 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백제인이다’라고 하는 사실에서 이 지역에 흐르는 정체성의 실체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겠다. 무강왕 설화가 전해지는 익산과 그리 멀지 않은 김제 지역도 오랫동안 마한의 영역이었다. 진표스님이 말한 ‘백제인’이라고 하는 것은 ‘마한인’이라는 말로 치환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렇듯 마한인들이 지녔던 정체성은 정치적으로 이 지역이 억압을 받았을 때 강한 저항의식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백제가 마한지역과 대등한 수준의 통합을 이룬 후에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어 부여계의 정통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마한인들이 반발하자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왕의 익산 천도론까지 나왔다. 의자왕이 왕권을 강화하며 마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귀족세력을 제어하려 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정치적 혼란이 격화되며 백제는 내부적으로 붕괴의 길로 들어섰다.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이 전개될 때도, 마한의 옛 세력 근거지인 영산강유역에서는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정체성을 상징했던 진표스님과 석탑 양식
그런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적극적인 융합정책 대신, 경주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는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앞서 언급한 진표가 ‘백제인이다’라고 하여 멸망한 지 200년이 지난 왕조 출신임을 강조하는 것이라든가, 이 지역에는 신라계와 무관한 이 지역 고유의 토착적 전통양식이 배어있는 석탑이 조영되는 등 이 지역이 지닌 고유한 역사적 전통은 더욱 강고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옛 마한·백제계가 지닌 정치적 상실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화되어 갔던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이 지역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이 지역 영암출신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해상세력을 건설한 원동력이나 마한·백제의 부흥을 외치며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견훤의 사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장보고 등장 이전에 무주(전남), 완산주(전북) 등 옛 마한지역에서 신라정부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체를 건설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김헌창의 난이다. 김헌창의 난에 대해 1990년대 중반까지도 김주원계와 김경신계 사이의 왕위 쟁탈전 연장으로 보거나, 무열왕계의 왕위부흥 운동으로 보기도 하였다. 또한, 인사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반란의 원인을 찾거나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지닌 중앙귀족과 지방세력의 합작으로 보아왔다.
 
김헌창 난, 마한인의 정체성 표출한 대사건
그러다 최근 김헌창이 국호와 연호를 새롭게 사용하는 등 신라와는 다른 정치체제를 지향하였고, 이 사건이후 지방세력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며 중앙집권을 지향하는 신라의 정치는 붕괴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옛 마한지역에 속하였던 무주·전주 지역에서 이러한 반란에 가담한 것은 마한 이래로 이 지역에 강고하게 형성된 정체성이 표출된 것도 난의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문제를 정리하여 보려는 까닭이다.

김헌창의 난은 신라 헌덕왕 14년(822) 3월에 발발하였다. 난의 진행 과정과 경과는 ‘삼국사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논리 전개상 필요한 부분을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①3월에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아버지인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長安이라 하고, 경운 원년이라 건원하였다. ②무진·완산·청·사벌 4주 도독과 국원·서원·금관사신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의 소속으로 삼았다. 청주도독 향영은 퇴화군으로 탈주하였고, 한산·우두·삽량·패강·북원 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아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 완산 長史 최웅, 州助인 아찬 정연의 아들 영충 등은 왕경으로 도망하여 이를 알렸다. 왕은 즉시 최웅에게 급찬과 함께 속함군태수를 제수하고 영충에게는 급찬을 제수하였다.(하략)

웅천주(공주) 도독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이유와 무진주(광주)와 완산주(전주) 청주(강주, 진주) 사벌주(상주)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가담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이유를 그의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데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시중이었던 김주원은 선덕왕 후사를 둘러싸고 원성왕이 된 김경신과 무력 충돌 끝에 패퇴하여 강원도 명주(강릉)에서 은거하였다. 김주원과 김경신의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싸움에 대해 ‘삼국유사’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김헌창이 그의 父인 김주원이 왕위계승 싸움에서 승리하였다면 응당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가 父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반발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김헌창이 도독으로 있는 웅천주를 비롯하여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등 9개 주 가운데 무려 다섯 주, 그리고 5소경 가운데 국원, 서원, 금관소경 등 세 소경이 가담하는 등 거의 모든 지방들이 반란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이들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가담하였던 까닭을 김헌창의 위협 때문이라고 삼국사기에서는 말하고 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들 지역이 동시에 김헌창의 거병에 뜻을 같이하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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