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3>‘백제의 마한’, 벗어날 의지는 있는가

월출산 기찬랜드 개장식에 참석했던 재경 신북면향우회원 40명이 7월 14일(일) 화순 운주사·고인돌 공원을 찾았다. 마침, 운주사에서 그들을 만나 영암의 역사를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 불과 2주 전 본란에 연재한 ‘운주사와 도선’의 실제 현장에서 영암출신 인사들을 대상으로 이야기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것을 보고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천리 떨어진 고향을 찾은 향우들의 모습이 ‘영암인의 저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온 초등학생에게 ‘영암’과 ‘월출산 동석’의 의미를 설명해주며 원적을 기억할 것을 당부하였다. 누차 이야기 하였지만, 필자는 출향인들의 ‘홈커밍데이’를 군차원에서 적극 추진하는 것도 영암의 정체성 확립은 물론 귀향 인구 증가와 관련하여 필요한 사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자긍심 내세워도 좋을 ‘영암’
이날 향우들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최근 발굴된 시종 쌍무덤 얘기를 꺼내며, 반남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이 독자적 마한왕국을 실증하여 주었듯이 그와 동일한 형태의 금동관편이 쌍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은 쌍무덤 피장자 또한 신촌리 9호분의 피장자와 마찬가지로 마한 왕국의 국왕임이 분명하다는 설명을 하였다.

시종·반남을 중심으로 하는 영산지중해의 마한 연맹왕국이 성립돼 있었다는 추론이 증명되었고, 이곳이 ‘영산지중해의 심장’임이 확인되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영암은 구한말 의병들이 일제와 전쟁을 치렀던 중심지였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능주·이양·보성·강진·해남 등 남해안 일대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일본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하였던 ‘호남제일의병장’ 심남일 의병의 주근거지가 국사봉 일대였고, 그 의병부대의 마지막 전투지가 시종지역이라는 사실도 함께 설명하였다. 심남일 부대의 2인자였던 선봉장 강무경의 처가가 영암 금정이고, 부인 양방매 역시 최초의 여성의병장이었다는 사실도 이야기 하며 수많은 영암출신 의병들이 조국을 위해 희생하였지만 현재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분은 다섯 분에 불과하다. 이는 영암지역 후손들이 역사적 책무를 소홀히 한 것이라고 필자가 일침을 놓았다. 여하튼,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사의 중심부에 있었던 영암의 역사는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하다는 얘기를 하였다.

엊그제 17일에는 김영록 도지사가 시종 쌍무덤 발굴현장을 찾았다. 전동평 군수를 비롯한 수많은 영암군민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마한역사공원을 중심으로 한 영산강유역의 마한왕국을 설계하는데 있어 이번 금동관편 출토가 갖는 의미가 절대적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호에 필자가 지적했듯이, 발굴에 참여한 전문가들조차 금동관편 피장자의 지위에 대해 ‘마한왕국’의 ‘국왕’이라는 언급 대신에 ‘마한사회’의 ‘정치적 수장’ 내지는 ‘최고위층’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제까지 인식되어온 ‘백제의 마한’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재론하고자 한다.

반복되는 ‘백제의 마한’ 본질을 살펴야
필자는 이미 지난 호에서, 7월 5일 담양에서 열렸던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와 백제의 유입’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원고도 보지 않은 채, 세미나의 방향이 ‘마한의 백제’가 아닌 ‘백제의 마한’을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레 짐작하였던 적이 있다. 그러한 내용의 발표문을 구해볼 필요성도 솔직히 느끼지 않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이날 나주공공도서관이 주관하고 ‘마한역사문화포럼’이 주최하는 포럼에서 ‘쌍고분 금동관편과 영산지중해 마한왕국’이라는 주제로 필자가 특강을 하였는데, 포럼회원이 담양에서 발표된 책자를 일부러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내용은 역시 예상대로였다. 우리 스스로 어리석음을 반복해야 하는가. 담양 발표장에 다녀온 포럼회원 역시 분노하고 있었다. 주제발표의 일부를 번잡스럽지만 그대로 전재하여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따르고자 한다. 우선 “문헌사학자들은 그들 사이에 다소의 견해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만 대체로 마한이 기원후 3~2세기부터 4세기 후반까지 존재하였다고 보고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중부지역의 마한은 소멸되었고, 그 잔존세력이 전남지역에 자리 잡았지만 근초고왕 24년(369년)에 백제에 의해 병합되었다는 것이다”며, 문헌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들었다. 이 주장은 이병도 등 기존 학자들이 60년 전부터 앵무새처럼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헌에도 명백히 나와 있는 521년 양직공도에 보이는 방소국을 통해 확인되는 마한왕국의 실체는 왜 애써 무시하고 있는가. 답을 듣고 싶다.

또한 “이 시기에 나타나는 독특한 문화양상은 한성 백제의 붕괴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으로 해석한다. 하나의 사례로는 나주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에서 보이는 백제가 아닌 가야와 관련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현상은 한성 백제의 붕괴에 따라 토착세력들이 자구책으로 비백제적인 요소가 증대되었다고 해석한다”며, 이 지역의 고유한 문화특질을 단순한 지방문화의 하나로 살필 뿐, 독자적인 마한왕국의 실체를 밝혀주는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있다.

시종지역에도 신촌리와 똑같은 정치세력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쌍고분의 유물들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지 묻고 싶다. 결국, 그들은 신촌리 9호분이나 쌍고분의 금동관은 백제 왕실이 이 지역 정치세력에게 준 위세품 내지는 지방의 수장층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한의 백제’ 관점 지닌 학자들 키워야
학자들의 생각은 자유이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필자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마한사를 부정하는 세미나를 이 지역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나서서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지역에 있는 국립연구소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이를테면 지난 7월 12일 순천에서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가야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경계의 가야’라는 주제의 학술 심포지움이 있었다. ‘금강 및 섬진강유역의 가야문화’ ‘남강유역의 가야문화’ ‘영·호남 경계의 가야사 위치 및 성격’ 등 크게 세 주제로 나누어 있었다.

그러니까 섬진강 이동과 이서에 있는 가야의 흔적을 확인함으로써 가야의 세력권이 섬진강 이서 즉 순천·구례지역까지 확장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러차례 본란을 통해 지적한 바 있지만, 전북에서는 공공연하게 ‘전북가야사’를 주장하고 있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가 확대되고 있다.

반면, 전북지역에서 마한사는 사라지고 있다. ‘경계의 가야’라 하면 당연히 ‘경계의 마한’이라 하여 섬진강 서쪽은 물론 동쪽에 있는 마한과 관련된 ‘경계의 마한’ 세미나는 왜 하지 않는지 역시 묻지 않을 수 없다.

7월 16일 연구실에서 받아본 한국고대사 학술지에는 ‘특집, 문헌과 고고자료로 본 가야사’라는 주제의 가야사 관련 논문으로 온통 채워져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가야사 조사·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논문에서는 대가야의 영역이 섬진강 서쪽인 순천·광양지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마한의 백제’ 인식할 마지막 기회
우리 지역에서 열린 수많은 세미나에서는 ‘마한의 백제’가 주장되기는커녕, ‘백제의 마한’ 주장이 반복되고 있고, 급기야 ‘전남 가야사’ 주장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이 이러하다면 굳이 ‘마한특별법’을 구걸하면서까지 지역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시종 쌍고분 출토유물은 신촌리 9호분과 성격이 거의 동일하다는데 발굴현장 조사원들도 인정하고 있다. ‘마한의 백제’ 시각에서 마한사를 살피려는 마지막 기회를 하늘이 준 것이라 생각한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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