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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내동리 쌍무덤 주인공은 마한의 국왕이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2>내동리 쌍무덤 발굴조사 의의와 한계

바야흐로 ‘마한의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국립청주박물관에서 ‘호서의 마한, 미지의 역사를 깨우다’라는 주제의 특별전(4,30~8,11)이 열리고 있다. 특별전과 연계하여 ‘호서 마한의 대외관계망 형성’이라는 학술 심포지엄도 열렸다. BC 1C부터 AD 4C 무렵까지 충청도 일대에 성립된 마한 세력을 살피고 있다. 호서지역의 마한문화가 AD 4C 무렵 백제문화로 서서히 바뀌어갔고, 북쪽의 낙랑, 부여와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세미나에서 필자는 두 가지 생각을 하였다. 첫째, 충청도 일대에 백제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한 때를 4C 이후로 살피고 있다는 점이다. 4C 후반에 전남지역이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주장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둘째, 호서지역 즉, 충청지역의 마한을 마한역사의 본류로 해석하려는 분위기가 있다는 점이다. 영산강유역의 마한사 정립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임을 절감하였다. ‘백제의 마한’이 아닌 ‘마한의 백제’라는 시각에서 우리나라 고대사를 서술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7월 5일에는 담양에서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와 백제의 유입’이라는 주제의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발표문을 보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백제의 영향을 전제로 한 세미나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기존 ‘백제의 마한’ 주장을 반복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전북에서 ‘전북 가야사’가 주장되고, 섬진강 동쪽 구례, 순천 등지에서도 ‘전남 가야사’를 주장하려는 움직임 등이 있다. 기본 관점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한사에 대한 관심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경이다.

이처럼 우울한 현실에서 필자가 평소 강조하였던 ‘마한의 심장 영암’을 뒷받침해주는 유물들이 나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 7월 2일,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1호분) 발굴조사 중간보고회가 현장에서 있었다.

쌍무덤은 4기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영암지역을 대표하는 대형고분으로 알려져 있는 1호분이 발굴조사 대상이었다. 길이 53m, 너비 33.6m, 높이 4∼7m의 제형(梯形)으로 된 고분은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도굴되었고, 분구 주위에서 많은 구슬들이 수습되었다. 쌍무덤은 목포대박물관이 1986년 지표조사를 하였고, 2000년 전남대박물관이 측량하였다. 이번에는 전라남도 산하 전남문화재연구소가 2018년 5월 1호분을 시굴조사를 한 후, 2019년 4월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마한의 심장 영암’을 뒷받침

1호분에서 석실 1기, 석곽 3기 옹관 1기가 확인되었고, 분구의 남쪽 사면에서 옹관 1기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1호 석곽에서 광구소호, 발형토기, 단경호 및 다양한 구슬(곡옥, 다면옥, 구슬옥)과 금제이식이 출토되었다. 2호 석곽에서는 유공광구소호, 직구호를 비롯하여 다량의 구슬(곡옥, 채색옥, 금박유리옥)과 금제이식 4점, 영락(瓔珞 구슬목걸이) 1점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번 보고회에서 가장 주목되었던 것은 2호 석곽에서 금동관 대륜부 상부 장식에 사용된 유리구슬과 영락, 금동관 조각편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장식용 유리구슬은 구슬의 3분의 2정도 하단부에 금동으로 도금하여 대륜부에 해당하는 상부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사용한 흔적이 확인된다. 이는 나주 신촌리 9호분 금동관에 장식된 유리구슬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발굴단은 물론, 언론이나 국민들이 흥분하기에 충분하였다.

뉴스를 본 많은 지인들이 필자에게도 축하한다고 연락을 주었다. 쌍무덤 발굴예산을 수립하는데 앞장선 영암출신 우승희 도의원 또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의원은 7월 3일 전라남도의회 도정질의를 통해 ‘마한의 심장, 영암’의 역사적 의의를 설파하며 마한역사공원 조성 등의 현안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였다.    

주구에서 출토된 형상식륜(形象埴輪: 동물모양 하니와)도 주목되었다. 형상식륜은 사슴 또는 멧돼지(?) 형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통형 토기는 중앙 돌대를 중심으로 상·하로 원공이 투공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기존의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와는 상반되는데 형상식륜의 기대부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확인된 형상식륜으로, 이곳 내동리 쌍무덤과 함평 금산리 방대형 고분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상(말, 닭, 사람인면)이 있다.

이렇듯 내동리 쌍무덤은 비록 일제 강점기에 도굴의 피해를 입었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 나와 이번 발굴의 의미를 한층 높여주었다. 중간보고를 통해 나온 결과를 토대로  ‘쌍무덤’ 발굴조사가 갖는 의의와 한계를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신촌리 9호분과 동일한 형식의 왕관

필자가 누차 언급했듯이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은 백제국왕이 사여한 위세품이 아니라, 반남 지역 마한 국왕이 직접 제작한 왕관이었다. 그것은 금동관의 형식이 백제계통이 아니라 가야와 왜 및 토착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마한 고유의 양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곧 마한왕국 국왕이 사용한 왕관인 것이다.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일본에서 수입된 금송으로 만든 관(棺) 등도 이 지역 국왕의 존재를 반증해준다. 쌍무덤에서 신촌리 고분과 동일한 형식의 금동관 파편이 나왔다는 것은, 이 고분의 피장자도 신촌리 9호분의 피장자와 같은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영산지중해 지역을 장악한 마한의 대국 ‘내비리국’은 시종과 반남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종지역이 잡았던 주도권이 차츰 내륙의 반남지역으로 넘어가는 형국이었다. 시종과 반남지역에 독립된 세력을 지닌 세력들이 마한 연맹체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추정을 입증해준다.
 
마한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옥

또한 주목되는 것은 많은 ‘玉’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본란을 통해 자세히 분석한 바 있거니와,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마한사람들은 玉을 金銀, 보석보다 귀중하게 여긴다”고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 여러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옥 유물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곧 마한을 상징하는 것이 ‘玉’이고, 그 옥문화의 중심지가 영산강유역이라는 점에서 ‘玉’이야말로 마한의 정체성을 확인하여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쌍무덤 주위에서 널려 있는 구슬을 수습하였다는 증언과 함께 이번 발굴에도 수많은 구슬이 출토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마한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니와는 융합문화의 특징을 증명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하니와’가 주목된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토괴 구조를 통해 영산지중해를 통해 유입된 문화가 토착문화와 용해되어 고유한 문화로 창조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이번 출토된 하니와도 단순한 문화교류를 넘어 이 지역의 개방적이고 독특한 마한의 문화특질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결국, 영산강유역이 마한의 심장이고, 한국 고대사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이번 쌍무덤의 유물들은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동관의 주인을 ‘마한왕국의 국왕’이 아닌 ‘마한사회의 수장층’이니, ‘마한시대 최상위층’이니 하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은, 결국 이 지역에 성립되어 있는 독자적인 마한 정치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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