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양달사·양방매 의병 등 애국투사 즐비 ‘의절의 고장’
국내 가장 치열했던 최후의 격전장 국사봉 활용가치 높아
전남도 공모사업에 타 시군 유치전 치열…영암군은 ‘뒷짐’

1984년 8월 광복절을 맞아 94세의 나이로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남편 강무경의 묘소를 찾은 국내최초 여성 의병장 양방매 할머니의 생전 모습. 금정면 양덕관의 딸로 태어나 18세 때 전북 무주출신의 강무경 의병장을 만나 남편과 함께 여성의병으로 활동했다.

■독립유공자만 40여명 달해

전남도가 호남의병의 구국충혼을 기리고 의병역사를 정립하기 위한 ‘호남의병 역사공원’을 추진하면서 각 시군의 유치전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영암군은 조선시대 최초의 의병과 여성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활동하고, 가장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을 보유한 경쟁력이 매우 높은 지역으로 꼽히고 있음에도 무대응으로  일관, 뜻있는 인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영암의 의병역사는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을묘왜변 때 의병장 양달사 형제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몽성·몽진 형제가 국난극복을 위해 나라에 몸을 바친 영암의 항일투사로 잘 알려져 있다. 도포출신 양달사는 조선시대 최초의 의병장으로 기록될 정도다.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은 1596년 9월 1일부터 3일간 영암을 방문하여 이 지역 군관 최숙남, 조팽년 등과 향사청에서 국난극복을 위한 민정활동을 전개하고, 이순신을 따라 나선 영암의병이 상당수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무렵 연주현씨 문중과 이순신 장군이 주고받은 서간첩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의 어록이 발견돼 지난 2017년 말 군서면 구림리 연주현씨 종가 앞에 이순신의 어록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한일합병 직전 영암의 의병활동은 금정면 국사봉 일대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최후의 격전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수많은 영암출신 애국선열들이 순국했다. 이 가운데 김치홍·유시연·조치덕·정관오·양방매 등 5명은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금정출신 양방매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즉 조선시대 이후 최초의 의병활동은 남녀 모두가 영암출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영암은 항일운동이 인근 어느 지역보다 격렬했던 곳으로, 지금까지 정부에서 추서한 독립유공자만 40여명에 이른다.

■최후의 격전장 국사봉 일원

영암에서는 1908년 봄부터 1909년 늦여름까지 국사봉을 거점으로 한 금정면 일대에서 의병투쟁이 호남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08년 5월 일본군 수비대 배치표를 보면, 전라남·북도에서 일본군 기병 1개 중대를 배치한 곳은 영암, 광주, 전라북도 고부 등 3곳이고, 다른 지역은 1개 분대만 배치했던 것으로 대한독립투쟁총사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의병부대를 독자적으로 지휘했거나 심남일 부대에 소속된 영암출신은 박평남(덕진), 박도집(시종), 김치홍(시종), 유시언(신북), 김선중(금정), 조치덕(금정)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심남일 의병장(함평출신)은 1908년 봄 국사봉으로 부대를 옮겨 다음해 여름까지 주둔하면서 일본군 헌병대장을 금정면 사촌전투에서 사살하고 나주 반치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워 우리나라 의병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대한민국 여성의병 1호로 기록되고 있는 양방매 의병은 금정면에서 태어나 18세 때인 1908년 9월 전북 무주출신의 강무경(심남일 부대 선봉장)과 결혼했다. 이후 남편을 내조하다1909년 3월부터 남편부대에 가담하여 장흥, 보성, 강진, 해남, 광양 등지 산악전에서 홍일점 여성의병으로 맹활약했다. 남편 강무경은 1909년 음력 8월 26일 능주 풍치에서 심남일과 함께 은신 중에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함께 있던 양방매 의병은 나이어린 여자라고 훈방돼 금정면 남송리 친가로 돌아간 후 평생을 수절하며 살다가 1986년 9월 28일(향년 96세)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묘지는 금정면 남송리 당치에 있었으나 1995년 10월 9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된 남편묘소에 합장되었고 이후 생가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3·1운동 때는 1천여 명의 군민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를 주도했던 조극환 등 18명은 실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하거나 태형 등을 받았다.

1919년 3월 10일 영암 장날을 택해 조극환(당시 33세)을 비롯한 영암 및 구림공립보통학교 학생 등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입수하는 등 거사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하여 한달 후인 4월 10일 또다시 영암 장날을 기해 박규상의 독립선언문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때 가세한 영암군민이 무려 1천여 명에 달했다.

이 사건으로 35명이 검거되어 실형에서 태형 또는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 가운데 조극환은 2년형을 복역했고, 박규상은 1년6월형을 복역 중에 병을 얻어 가족들의 부축을 받고 귀향하던 중 서호강에서 세상을 떴다.

학생들의 항일운동도 매우 활발하게 전개됐다. 영암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3.1운동 당시 태극기 제작과 함께 “조선 국사를 가르치라”며 동맹휴학을 감행, 당시 일본인 교장이 자살했고, 광주·목포 등지의 유학생들은 성진회와 독서회를 통해 학생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나섰다.

김민규, 조극환, 유혁, 한동석 김상학 등을 중심으로 한 신간회 영암지회의 활동과 비밀결사운동도 주목을 끌었다.

■‘영보 형제봉 사건’도 전국에 주목

특히 유혁, 곽명수씨 등이 주도하여 덕진면 영보정에서 일으킨 농민항일운동은 시위대 중 100여명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74명이 재판에 넘겨져 최고 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동아 등 신문에 ‘영보촌 형제봉 사건’으로 80여 차례 보도되면서 전국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해 국가보훈처는 이 마을 출신 최병수·최동림·신용주·신용점 선생 등 6명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서훈에서 배제됐지만 심사기준이 달라지면서 뒤늦게 유공자가 됐다. 이로써 ‘영보 형제봉 사건’ 관련 독립유공자는 모두 15명으로, 당시 재판에 회부된 74명 전원이 서훈을 받게 될 경우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서훈자를 배출하게 된다. 이는 국내 독립운동사에 보기 드문 사례다.

또 최동환, 최석호 등은 비밀단체인 영구회를 조직하고, 영보마을 중심으로 야학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처의 후회’라는 연극을 공연하는 등 항일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

낭산 김준연 선생도 192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우리나라 사회개혁운동과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했다.

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장은 “영암은 영암인의 얼이 살아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충의 예절이 바르고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신을 이어 받아 인근 어느 지역보다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면서 “이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는 추모 사업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무이며, 영암인의 자긍심이다.”며 국사봉을 중심으로 호남의병 역사공원 유치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했다.

■도내 시·군 유치전 치열

호남의병 역사공원은 정부와 전라남도가 2022년까지 총사업비 480억원을 들여 33만㎡ 부지에 기념관, 전시실, 테마파크, 상징조형물, 학예실, 교육관 등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전라남도는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연구용역과 시군 공모를 통해 9월쯤 후보지를 선정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전남도는 의병들의 충혼을 기리고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호남의병 역사공원’을 추진키로 하고, 올해 1억원을 들여 ‘호남의병 역사공원 기본계획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연구용역이 연내에 마무리되면 내년 실시설계에 들어가 예산 중 13억원은 국고지원을 받아 공원조성 사업에 나설 계획이다.

’호남의병 역사공원‘은 역사기념관이라는 무겁고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누구나 찾아와 보고, 듣고, 체험하며 쉴 수 있는 친근한 공간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사업 대상지는 역사적 상징성·접근성·부지 확보와 개발 용이성·주변 관광지와 연계성 등 다양하고 객관적인 평가지표를 용역으로 확정하고 시·군 공모를 거쳐 선정한다. 이에 따라 해남·강진·함평 등 전남도내 각 시군에서 유치전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특히 해남군은 일찌감찌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유치위원회를 결성한데 이어 명현관 군수와 지역사회단체장들이 ’도민과의 대화‘에서 뿐만 아니라 김영록 전남지사를 직접 찾아가 건의문을 전달하는 등 유치전에 사활을 걸고 있다. 또한 해남군은 흩어져 있는 각종 논문과 자료 등을 수집해 해남의병의 역사를 집대성한 자료집을 발간하고 상징성 등을 고려해 적정 대상지를 물색하는 한편 지역주민들의 의지를 모아 본격적인 유치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이에 반해 영암군은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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