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전 광주 서광초등학교 교장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온 나라를 피바다로 물들인 한국전쟁 때였다. 큰삼촌은 4남매 중, 둘째로 선친(先親)의 동생이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좀 똑똑해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가난하였지만 행복하게 살던 중, 전쟁의 폭풍이 불어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고 말았다.

좌우사상의 충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반대편 사람은 무자비하게 죽이는 그 무서운 상황에서 큰삼촌도 휘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느 편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인지 판단할 수 없었던 때였다. 국가의 강력한 힘은 큰삼촌을 흔들고 말았다. 앞으로 불어 닥칠 불운을 예측하지도 못한 채, 보도연맹(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에 가입하였다.

당시는 남보다 야무지고 앞장 설만 한 사람들은 모두 가입당했다. 마을별로 할당하여 이장이 가입시키고, 취직을 시켜준다든지, 식량·고무신을 준다는 등의 달콤한 말에 꼬임을 당해 가입하게 되었다. 북한 괴뢰의 포성에 산천이 갈기갈기 찢기고 피난민은 늘어만 갔다. 온 나라는 붉은 물이 들어갔다. 중과부적인 국군의 힘, 젊은 학도병까지도 삼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육성 방송을 틀어놓은 채,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은 남행 열차를 타고 대구, 부산으로 도망을 갔다. 내편으로 편 가름해 유용하게 쓸 동량으로 조직한 보도연맹원들에게 천인이 공노할 대통령의 학살명령이 떨어졌다. 국가의 공권력이 약화되니까 이승만 정권은 오직 정권유지를 위한, 아니 나라의 위기관리 쪽인 학살로 대체했다. 전국의 당원들을 국가의 공권력은 조국 산천에 집단학살을 하고 말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차 없이 죽였다. 빨갱이, 빨치산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였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 외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 하소연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전국에서 20여만 명이 죽어가야만 했다. 국가가 죄 없는 민간인을 사살했으니 하늘이 놀라고 땅이 울 일 아닌가? 7월 22일 영암군도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내 큰삼촌도 그렇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우리 가족들은 또 다른 피해가 염려되어 총살 현장에 접근하기도 두려워 공포에 떨었으나 어떻게 하든지 시신은 수습해야 하기에 조부모님과 식구들이 큰삼촌 시신수습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백여 구 시신이 서로 뒤엉켜 수습에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총살 후, 살아남기 위해서 부둥켜안거나 총탄에 피투성이 된 모습을 보고 치를 떨었다고 할머니는 증언했다. 총살당한 자들은 흰옷이 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얼굴 보고는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나 평소 검은색 양복을 즐겨 입은 큰삼촌은 쉽게 눈에 띄었으며, 노랑혁대는 시신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한다. 선산에 모실 여유도 없어 소나무 밑에 급히 안장을 했다고 작은 삼촌은 눈시울을 적셨다. 

큰삼촌을 보도연맹에 강제로 입당시켜 무참히 죽인 것도 부족해 내 아버지까지 연행해 죽음으로 몰았다. 내가 고향 모교에 근무할 때, 여름방학 중, 연가를 내고 월북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광주로 전입해 도교육청에서 내 인사기록부 원본을 보니 빨간 글씨로 ‘보도연맹원, 부역혐의자 가족’ 요주의 인물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나는 2006년 말, 아버지와 큰삼촌 사건을 접수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두 분의 진실을 밝혔다. 그러나 아버지는 시효상실(신청기간의 만료로 인해 법적 신청을 못함)로 법원에 배·보상 재판청구를 하지 못했고 큰삼촌만 국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였다. 일 년이 넘는 투쟁 끝에 증거 불충분으로 법원에서 패소하고 말았다.

“내 민족이여! 우리 국민이여! 이럴 수가 있답니까?” 하늘이 빨갛게 물들도록 울어도 끝이 없었다. 사실들을 다시 상세히 밝히는 구체적인 진술서, 탄원서, 사실증명서를 제출했다. 증인 신청을 하여 시신수습 현장을 목격했던 작은 숙부님이 사실들을 전라도 사투리로 웅변하듯이 낱낱이 증언했다. 또, 통계청에서 작성해 두었던 사살자 명부를 찾아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억○천만 원의 금원을 정해진 기간 안에 지급하라!” 지루한 법정싸움은 끝이 나고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배·보상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은 어언 69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한국전쟁 희생자들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그 유족들은 진실규명을 위해 지금도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 부모형제, 자매는 어떤 죄를 지어 누가 가해를 했을까? 어떻게, 왜, 어디에서, 어느 날 죽어가야만 했는지? 이 억울한 사실들을 지금이라도 속 시원하게 알고 싶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과거역사는 현재역사의 진행으로 숨어 꿈틀거리기 때문일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니 알고 있다. 위정자는 국민의식을 깨끗이 정리해야할 의무가 있다. 우리 모두의 일이니까, 그것이 곧 역사의 정답이다.

※수구(愁懼) : 근심하며 두려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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