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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시기에 세워진 절로 추정되는 운주사 도선국사 주석■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1>운주사와 도선

며칠 전, 경남 남해군 국도변에 있는 고인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동기와 민무늬 토기 등 다량의 유물이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 국토 어느 곳을 막론하고 유적·유물들의 보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머지않아 마한의 실체를 보다 분명하게 입증해주는 증거들이 영산강유역에서도 쏟아져 나오리라 기대해 본다.

앞서 도선국사와 해상왕 장보고가 화순 운주사와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가 있을 법하다는 얘기를 꺼낸 바 있다. 운주사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와 용강리에 걸쳐 소재하고 있는 조그마한 사찰이다. 그러나 그 주위의 평지 및 야산 골짜기에 80여 구의 석불과 18기의 석탑이 산재하고 있어 그 특이한 조형미와 규모 면에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들이 관심을 가진 이래 전남대 박물관에서 여러 차례 절터 발굴조사를 하여 운주사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도선국사가 주석했던 운주사

주지하다시피, 통일신라 말 도선스님이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운주사는 석불의 배치모양이 배 형상을 하고 있어 ‘運舟寺’라고 불리었고, 이 또한 해상왕 장보고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근거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운주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도선스님이 창건했다는 얘기부터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다는 주장, 12세기에 건립되었다는 주장, 11세기 초반을 상한으로 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운주사에 관해서는 “運住寺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의 좌우 산록에 석불석탑이 각기 1천여개 있으며, 석조 감실(龕室)에는 두 석불이 등을 마주하고 있다”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내용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운주사는 조선 중종 이전에 이미 현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弘治八年’ 銘의 출토 와편을 통해서도 연산군 1년에 운주사 중수(重修)가 확인되고 있다.
 
신라 때 조성된 천불천탑의 기록

조선후기 유명한 실학자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에는 “이들 석불석탑이 신라 때 조성되었다는 주장과 고려 때 혜명(惠明)스님이 조성하였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여 창건시기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즉, 석불석탑이 신라, 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여기에 있는 내용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면 운주사는 고려 또는 그 이전시기에 창건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선스님이 이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를 후대의 꾸민 이야기라고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게 하는 것이다. 유형원이 이러한 사실을 기술한 것은 당시 이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형원의 언급 가운데 특이한 것은 고려시대에 ‘혜명’스님이 창건하였다 하여 특정 스님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 도선스님과 관련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다. 이것은 유형원이 당시 천불천탑을 도선이 쌓았다고 하는 전승이 없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하룻밤 사이에 천여 개의 탑을 쌓는 것이 가능하였겠는가 하는 실증적인 관점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있다. 최근 절터를 발굴한 결과 운주사 창건 시기는 늦어도 11세기 초반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이미 운주사가 실재해 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유형원이 언급한 운주사 창건시기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운주사 창건은 불회사와 관련

앞서 필자는 운주사를 도선이 창건했다기 보다는 이미 실재한 절에 주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지적한 바 있다. 운주사는 불회사와 불과 7㎞가량 떨어져 있을 정도로 매우 근접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회사는 영산지중해를 통해 마한 땅에 들어온 마라난타가 마한 땅에서 가장 먼저 세운 절이다. 마라난타는 이곳을 근거로 포교 활동을 하다 침류왕의 초청으로 백제를 찾았던 승려이다. 불회사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불법이 널리 퍼져 갔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인근에 있는 운주사가 창건되어 있는 것은 단순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불회사의 영향을 받아 운주사도 마한 또는 백제시대에 이미 일찍 창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필자가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주장보다는 그곳에 주석을 하였다고 보는 이유이다. 운주사가 마한시대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역사성 때문에 도선이 그곳에서 주석하였을 가능성이 크고, 장보고 또한 그곳의 단월로써 절의 발전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고려 때 혜명스님이 무리 수천을 이끌고 탑상을 조성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광종 때 관촉사를 창건한 慧明스님과 연결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惠明’ 스님과 음이 같은데다 고려 광종 19년에 100여 명의 공장들을 데리고 37년 만에 관촉사를 세웠다는 내용의 사적기의 내용과 천불천탑을 무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세웠다는 것이 서로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운주사의 창건시기를 고려 건국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신라 말에 세워졌다는 내용과 시기적으로 차이가 크게 없다. 이를테면 필자가 추정하는 마한·백제시기에 운주사가 이미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하겠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도선스님이 세웠다는 사찰이름이 다수 보이고 있다. 무등산 규봉사, 강진 무위사, 광양 옥룡사를 도선스님이 창건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운주사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도선이 운주사 창건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行舟論’은 고려초기 성립된 사상 

조선 후기 1743년(영조 19)에 중간된 ‘도선국사 실록’에 “우리나라의 지형은 行舟形으로 능주의 운주곡이 그 복심에 해당하는 곳인데 배를 진압할 物이 없으면 표몰하기가 쉽기 때문에 그 복심인 運住谷에 천불천탑을 세워 그 背腹을 잃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 도선스님과 운주사를 연결하는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현종 때 이경석이 찬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사비’에 배와 유사한 지형의 首尾를 진호하기 위해 절을 세우고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가지고 이른바 ‘行舟論’이 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자세히 살핀 바 있듯이 도선의 풍수지리 사상이 고려건국 초기, 고려 중기에 각각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널리 유포되었다면 ‘행주설’은 이미 그때 성립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전승된 것을 조선 후기에 불교가 다시 부흥하는 시기를 맞아 도선에 관한 전기 및 탑비들이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운주사의 본명은 ‘運舟’였다

운주사의 절 이름에 대해서도 ‘運住’인지 ‘運舟’인지 여러 설이 있다. 혹자는 조선 초기에는 ‘運住’를 쓰다가 영조 때에 ‘행주론’이 나오면서 ‘運舟’를 절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운주사가 고려 초기에 널리 퍼진 비보사상과 관련이 있다면 ‘행주론’은 그때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절 이름도 이와 관련이 있는 ‘運舟’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리학적 관점이 강조되며 ‘運住’로 바꾸어져 사용되다 영조 무렵에 다시 ‘運舟’라는 본명을 찾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점에서 지금 ‘運住’를 절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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