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암의 노랫말을 찾아(7)
덕진출신 김지평, 영암읍민의 날 ‘가슴에 고향’ 노래 선물

고향방문 선물로 지은 노래

광주 나주 영산포 아래아래
기차도 닿지 않는 곳
내 엄마 젖가슴 만지면서 어린 남매 자라난 고향
천황봉에 구름 놀고 구름 위에 달이 놀았지
까투리 떼 나르고 사슴 노루 뛰던 곳, 내가 어찌 너를 잊으랴.
영암아 영암아 월출산아 나는 너를 품고 산단다.

무안 목포 영산호 돌아돌아
꼬막조개 물새의 고향
오빠 누나 손잡고 학교 가면 기억 니은 재미 있었네
구정봉아 그립구나 구름다리 너도 그리워
순이집에 동백꽃 우물가에 물방아, 눈물 어린 가슴에 고향
영암아 영암아 월출산아 나는 너를 품고 산단다.

        <가슴에 고향-김지평 작사·작곡>

‘당신의 마음’(방주연) ‘숨어우는 바람소리’(이영옥) ‘인생은 미완성’(이진관) 등 걸작을 내놓으며 작사가로 명성을 떨친 덕진면 금강리 금산마을 출신 김지평(77)씨는 이 밖에도 수많은 곡을 발표해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다. 특히 그는 영암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향에서 체득한 감성과 문학적 자양분을 통해 주옥같은 노랫말을 쏟아냈다.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와 문학평론가 이관희씨가 극찬한 ‘당신의 마음’과 같이 영암(덕진천)을 배경으로 한 노래는 무수히 많다.

지난 2012년 ‘영암읍민의 날’을 맞아 덕진면 출신 김지평씨(77)가 노랫말을 짓고 곡을 붙여 발표했던 ‘가슴에 고향’도 그 중의 하나다.

당시 이정훈 영암읍장의 간곡한 초대에 의해 바쁜 시간을 쪼개 고향을 방문한 김지평씨는 월출산을 늘 가슴에 품고 살기에 노래 제목을 ‘가슴에 고향’이라 붙였다 한다.

이날 고향방문 선물로 깜짝 내놓은 이 곡은 본인이 직접 부르며 첫 선을 뵌 것으로 고향 주민들에게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70이 넘은 나이에 서울에서부터 악기를 메고 악보를 챙겨 떠났던 것은 ‘언제 다시 군민들에게 인사드릴 날이 있을까’ ‘어쩐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리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구성하고 해설하던 방송 프로그램 ‘세월따라 노래따라’ ‘그 시절 그 노래’ 등에서는 가끔 노래를 했었으나 고향에서는 그것이 처음이었고 아마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고 했다. 작사가로 널리 알려진 김지평씨는 작곡 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던 팔방미인의 영암이 낳은 거장 음악인으로 각인되고 있다.

김지평씨는 ‘가슴에 고향’ 음악 발표가 있던 그 날, 행사장에서 어릴 때 자신을 업어 길러준 누나(판례)를 우연히 만나 기쁨이 더 컸다고 회고했다. 이 노래는 이후 김지평씨가 아끼던 제자(임부희 동국대 가요전문지도사 과정 주임교수)를 중심으로 중창단을 결성, 취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낙엽을 모아서 불을 질렀네
뚜야의 편지도 같이 태웠네
옥같은 그 사연 재가 될 적에
돌같은 이 마음 눈물 되었네
아빠가 왜 우냐고 물었을 때
낙엽 타는 연기가 맵다고 했네
낙엽에 불질러 편지 태울 때
뚜야의 얼굴이 앞을 가렸네.

          <뚜야의 편지-김지평 작사·작곡>

영암호의 추억이 담긴 뚜야의 편지

1974년 2월 지구레코드공사에 의해 발표된 ‘뚜야의 편지’도 덕진출신 김지평씨가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인 노래로, 고향에 대한 추억이 많이 묻어 나 있다. 노래는 예그린합창단에서 활동했던 가수 김유정이 불렀다.

옛 덕진천에 바닷물이 드나들 때 군서 해창에서 목포까지 연락선이 다녔다. 그 연락선 ‘영암호’의 기적소리 ‘뚜우’ 소리를 본 따 목로주점 ‘뚜우집’이 있었고, 그 뚜우집의 소녀가 ‘뚜야’라는 애칭으로 불려져 이 노래 속에 남아 있다.

덕진 금산에 살며 영암고등학교를 나왔던 김지평 작가는 졸업 후 영암호를 타고 여행을 갔는데 목포 선착장에 도착, 영암호에서 내리니 목로주점 ‘뚜우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 ‘뚜우집’이 신기해서 집 앞에 놓인 나무 걸상에 앉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뚜우집’에는 중년의 어머니와 어머니를 거드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왜 뚜우집이라고 했지요”라고 물으니 소녀가 “맨날 뱃고동 소리가 뚜우~뚜우~해 싸니깐 그 소리 숭내서 뚜우집이라 했지라이”라고 말했단다.
다른 곳을 여행하고 두 달 가량 지나 집에 와보니 그 소녀의 엽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는 그녀에 대한 애칭을 ‘뚜야’로 정하고 정성껏 답장을 썼다. 하지만 그 편지는 되돌아 왔고, 방을 옮겨버린 소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한다. 뱃고동 소리의 이름을 가진 소녀는 자신이 그런 이름을 가진지도 모른 채 작가만의 이름과 사랑으로 남았던 것이다.

작가 김지평은 “영암인들이 해창나루를 통해 연락선 영암호를 타고 해로 여행을 떠나던 시절…영암호의 ‘뚜우~’ 소리에 한참 때 두참 때 시간을 쟀었고, 영암호의 ‘뚜우~’ 소리에 손님맞이 짐받이 가느라 바빴었다. 그 옛날 왕인박사도 천자문 싣고 그 물길 따라 일본문화가 있게 하였는데…그립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물길 그 뱃길을 지키다 사라진 영암호의 뚜우 소리...연락선은 막히고 다리가 놓여 버린 해창을 보면 바보같이 눈물이 돈다”며 어린 시절 애잔한 사랑과 함께 고향에 대한 옛 추억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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