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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의 스승 ‘신희남’과 덕진 ‘영보정’
서 일 환

서호면 산골정마을 生
전 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광주전남의료발전협의회장
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한호(韓濩)는 조선시대 서예가로 호가 석봉이라 한석봉(韓石峯)이라고 부른다. 한석봉은 개성에서 태어나서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한석봉은 서경덕의 소개로 신희남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신희남이 사색당쟁을 피해 전라도 영암으로 낙향하자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함께 따라와서 독천장에서 떡장사를 하면서 아들을 공부시켰다.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한석봉은 뛰어난 필법으로 외교문서를 관리하는 사자관(寫字官)으로 임명됐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의 명필 주지번이 한석봉의 글을 보고 ‘왕희지(王羲之) 및 안진경(顔眞卿)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고 극찬했다.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종4품 가평군수에 임명했으나 탄핵을 받아 종6품 통천현감으로 좌천됐다.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도학에서는 서경덕, 충의에서는 송상현, 문장에서는 차천로, 필법에서는 한석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신희남(愼喜男)은 전라도 영암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5품 수찬과 정4품 장령을 역임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종2품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붕당에 환멸을 느끼고 종4품 금산군수를 거쳐 고향인 영암으로 낙향했다. 신희남은 할아버지 신영명(愼榮命)이 건축한 사당 주변에 연못을 파서 청백을 상징하는 연(蓮)을 심고 충절을 상징하는 오죽(烏竹)을 심고 편액을 이우당(二友堂)이라고 하였다. 이우당 앞에 송양서원(松陽書院)을 개설하여 한석봉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신희남은 영보정(永保亭)을 중수하고 대학자이자 이조판서를 역임한 이이, 청백리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박순, 종계변무를 시정하고 호조판서를 역임한 이후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학문을 교류했다. 영보정은 최덕지(崔德之)와 신후경(愼後庚)이 낙향하여 건축한 정자이다. 영보정이 황폐화되자 최정(崔珽)과 신천익(愼天翊)이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최덕지는 문종의 스승이자 신후경의 장인으로 남원부사를 역임했고 정3품 예문관 직제학을 역임했다. 신후경은 최덕지의 사위이자 신희남의 증조부로 의례를 관장하는 정3품 좌통례를 역임했다. 최정은 최덕지의 7대손으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영암에 은둔했다. 신천익은 신희남의 종손으로 인조반정에 반대하며 영암에 은둔했고 종2품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영보정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누정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며 방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의 마루가 놓여 있다. 광해군 때 양경우가 남긴 ‘야등영보정(夜登永保亭)’과 정조 때 정약용이 남긴 ‘등영보정(登永保亭)’이 전해진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됐고 한석봉의 친필 현판이 붙어 있다.

1921년 영보정에 영보학원을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항일정신을 배양했다. 1931년 영보학원을 중심으로 ‘일본놈은 물러가라’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영보만세운동은 99명이 체포되어 67명이 실형을 받았고 단일사건으로 3.1운동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9년부터 전주최씨와 거창신씨가 공동으로 영보의 전통과 항일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매년 5월 5일 영보풍향제를 개최하고 있다.

왕인박사와 도선국사가 탄생한 영암은 가장 먼저 달을 맞이하는 ‘월출산국립공원’, 2,200년 전통의 ‘구림마을’, 천년고찰 ‘도갑사’, 우리나라 최대의 ‘자동차경기장’, 영산강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달마지쌀’, 더위 먹은 소도 일으키는 ‘낙지’, 꽃이 없는 열매라는 ‘무화과’, 임금에게 진상된 ‘어란’ 등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년이다.

서일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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