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89>영암과 해상왕 장보고(中)

완도에는 장보고 전승설화가 없어
 

덕진 선암마을에는 장보고 어머니가 장보고를 낳기 위해 칠년간 공을 들였다는 건덕바우와 장보고가 당나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국두암,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장보고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있는 곳을 신성시했다는 내용 등으로 볼 때 해상왕 장보고는 덕진 선암마을 출신일 가능성 매우 높다. 사진은 중국 법화원의 장보고 동상, 완도 장도 당집.

최근 울진 성류굴에서 신라 진흥왕이 그곳을 행차하였다는 명문이 발견되어 고대 사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곳 영암 시종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산지중해 이곳 저곳에도 마한의 역사적 흔적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남아 있을 것이다. 지역민들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하겠다.
당 시인이 작성한 장보고에 관한 최초의 전기가 신당서 및 삼국사기에 전재되어 있다. 사서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장보고와 정년)의 고향과 父祖는 알 수 없다”고 하여 출신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만 언급되어 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당시 장보고의 출생과 관련된 자료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암 덕진면 선암마을에 장보고의 출생 설화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은 전승시기가 언제였는가를 떠나 주목되고도 남음이 있다.

애초 당제는 장보고를 배향하지 않아

장보고의 출신지라고 알려진 완도에는 출생과 관련된 어떠한 설화도 전하지 않고 있어 오히려 의아하다. 장보고와 관련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당제(堂祭)가 완도 장좌리 장도에서 오랫동안 행해지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당제를 모시는 당집의 가운데는 주신격인 송징 장군, 우측은 정년 장군, 좌측은 혜일대사가 배향되어 있다. 장도 지역에서는 송징이라는 인물이 그 지역의 상징인물이고, 장보고는 그곳에 아예 배향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근(1982)에 이르러서야 겨우 배향의 대상으로 추가되었던 것이다. 장도 지역에서는 장보고가 아닌 송징이 주 배향 대상이었다.

송징은 송장수라고 하는데, 몽고에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하였던 고려 삼별초의 장수였다는 전설이 장도에 전하고 있다. 완도 일대에서 채록된 전설들을 살펴보면, 청해진의 본거지인 장좌리 일대는 물론 인근 도서지역인 신안 압해도까지 송징에 관한 얘기들이 전하고 있다. 이 송징에 관한 전설이 장보고와 관련된 것이라는 이해가 많았다. 원래 있었던 장보고 전승이 신라 정부에 의한 장보고 암살과 청해진의 파괴와 같은 외부의 심각한 충격으로 전승이 바꾸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해진 세력이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구비 전설의 전승이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당제에 장보고는 1982년 배향돼

그러나 정년을 당제에 배향하면서 장보고를 의도적으로 송징으로 대치했다고 하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만약 송징 설화가 장보고 설화를 대체하는 것이라면 신안 압해도 지역 또는 다른 서남해 어느 곳에 장보고 관련 전승이 있어야 옳을 것이다. 말하자면  청해진 세력이 벽골군으로 이주해갈 때 이탈 세력이 중간에 남아 있었을 것이고, 이들에 의해 얼마든지 장보고 전승이 남아 있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승이 없다는 것은 실제 장보고 설화가 완도나 서남해안 일대에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보고 전승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주로 조선후기 기록들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다.

당제에 장보고가 배향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이후, 그것도 전문가들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말하자면 민간전승에서는 송징을 장보고와 연결을 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완도지역에 장보고의 출생과 관련된 전승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1982년 장보고가 당제에 추가로 배향될 때, 송징이 탈락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장보고를 대체한 인물이 아님을 말해준다.  
 
선암마을 장보고 설화는 구체성 보여줘

결국 영암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에 장보고 출생 설화가 전승되고 있는 것은 분석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봉산을 배산으로 월출산을 마주보고 있는 선암마을은 지금은 내륙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마을 앞 바위에 배를 매었다는 선암(船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포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덕진면의 ‘덕진’, 인근 ‘해창’, ‘도포’, 시종의 ‘남해포’ 등을 함께 연결지어 보면 영산지중해 입구에 있는 항구였다. 선암마을에는 마을 형국이 배 모양과 같다 하여 ‘船岩’이라 하기도 하고, 건덕바우와 국두암과 같은 신령스런 바우가 있다 하여 ‘仙岩’이라는 마을이름이 나왔다는 전승이 있다.

건덕바우는 장보고 모친이 그 바위에서 7년간 기도를 하여 장보고를 낳았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고, 국두암은 장보고가 중국에 건너갈 때 배를 탔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선암마을에 전하는 장보고 전승을 보면, 첫째, 장보고 모친이 장보고를 낳기 위해 칠년간 공을 들였다는 건덕바우, 둘째, 장보고가 당나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국두암, 셋째, 조선시대에는 장보고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있는 곳을 신성시하였다는 내용 등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이처럼 선암마을에 장보고의 출생과 관련된 구체적인 설화가 전승되고 있는 사실은 장보고가 이곳 출신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설사 장보고가 완도 장좌리 등 서남해의 어느 지역 출신이라고 한다면 장보고 세력이 붕괴된 후 그 세력이 해체되어 분산되는 과정에서 일부 세력이 이곳 선암마을에 정착하면서 장보고 출생 설화가 형성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설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볼 때, 그리고 영산 지중해상의 입구에 위치한 선암마을 근처에 당시 당나라와 연결되는 국제항이 있었고,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과도 가깝다는 지정학적인 위치를 고려하면 장보고가 선암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도 크게 잘못은 아니라 생각한다.
 
선암마을은 당나라·청해진과도 통하는 곳

선암마을 인근에 영산지중해의 국제항인 상대포가 있었다.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이중환이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월출산 남쪽에 따듯한 월남마을이 있고, 서쪽에 구림이라고 하는 큰 마을이 있는데 모두 신라 때의 명촌 마을이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갈 때는 영암군 바다에서 배가 떠났다. 하루를 타고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이 섬에서 하루를 타고 가면 가거도에 이르고, 여기서 북동쪽으로 사흘을 가면 곧 절강성에 이르고, 만약 순풍이면 하루 만에 이른다. 남송이 고려와 통할 때도 절강성 해상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이면 고려 국경에 상륙하는데 그곳이 영암군이다”라 하였다. 구림 상대포가 마한이래로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국제 무역항이었다. 통일신라 때는 동남권의 울산항과 함께 서남권을 대표하는 항구였다.  

이곳을 통해 마한시대에 왕인박사가 渡日하였고, 동진 승려 마라난타는 불교를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영산지중해 입구에 위치한 상대포는 인근 국제무역항인 남해포와 함께 외국 상인, 승려, 사신들이 많이 왕래하는 항구였다. 이곳과 가까운 선암마을에서 장보고가 태어났다면, 그는 어려서부터 국제적 감각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일찍 중국으로 진출하게 된 이유가 되겠다. 결국 선암마을에서 장보고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장보고는 혜철·도선의 후원 세력

장보고와 이 지역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장보고와 도선의 스승 혜철과의 관계이다. 산동반도에 법화원을 설치한 장보고는 엔닌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훌륭한 승려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도선의 스승 혜철이 중국에 유학 다녀오고, 동리산문을 개창할 때 장보고의 도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보고의 경제적 지원이 이들 사찰들이 번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구림출신 도선이 혜철문하로 출가하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도선이 태어난 해가 828년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가 되었던 해이다. 도선은 영암출신 장보고와 일찍부터 인연이 닿아 있었다고 하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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