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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읍 장년리 일대와 해보·월야 일대가 두 정치체의 중심지였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87>함평천·고막원천 유역에 형성된 마한 연맹체(下)

함평군지를 보면 함평지역에 마한의 대국 ‘신미제국’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미제국이 해남반도에 위치하였다는 의견이 많다. 함평지역으로 비정하는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다.  신미제국으로 연결하는 것은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함평은 함평천 유역의 굴내현과 고막원천 유역의 다지현 세력이 통합되었다. 밀집된 지석묘 군을 통해 적어도 청동기시대 이래로 두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함평천 유역에 위치한 장년리 당하산 유적은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유물들이 한 곳에서 출토된 복합유적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오랫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 고분 변화상을 보면, 지석묘 중심의 고분에 기원전 3세기 무렵 등장한 목관묘가 새롭게 추가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영산강유역에서 두 묘제가 중첩되고 있다.
 
토착문화 바탕위에 외래문화 융합

함평지역 목관묘들은 고막원천 상류에 해당하는 월야면 ‘만가촌 고분군’에서 9기의 목관묘가 나온 것을 비롯하여 함평천 유역에서 1, 2기 등이 발굴되는 등 전체적으로 수효가 많다고 할 수 없다. 아직 발굴조사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들 지역에서 목관묘가 지석묘를 대체하는 새로운 묘제로 등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완전히 대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이 지역에 도입된 새로운 문화요소가 토착적 전통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러나 기원 전후하여 옹관묘가 영산강유역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음을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목관묘를 대신하여 옹관묘가 빠른 속도로 영산강유역의 주 묘제로 자리잡고 있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서남부 지역에서는 목관묘와 공존하였던 소형 옹관묘가 대형의 전용 옹관묘로 발전하면서부터 목관묘의 비중이 크게 줄어든다. 이러한 현상은 경기·충청지역 마한권에서 목관묘가 지속되는 가운데 백제의 적석총이 등장하고, 영남의 진한·변한지역에서 목관묘가 목곽묘로 발전하는 것과는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가촌 고분군에서 옹관 가운데는 소형 항아리를 이어 만든 전통적인 소형 옹관묘와 함께 대형 항아리를 이용한 새로운 대형 옹관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말하자면 만가촌 고분군은 소형 옹관묘가 대형 옹관묘로 발전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옹관묘가 이 지역의 새로운 묘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목곽분에서 옹관묘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 만가촌 고분군은 영산강유역의 독자적인 문화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고 임영진 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만가촌 고분군에서 목관묘와 함께 나온 옹관들은 U자형 전용 옹관이 아니라 적갈색 연질에 잘록한 목이 형성되어 있는 초기 형태의 대형 옹관을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함평 지역 옹관묘들이 다른 지역보다 옹관묘를 주 묘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옹관묘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원저호나 심발형 토기가 많다. 목관묘에 부장된 유물들과 동일한 것으로서 두 묘제 사이에 계통적이거나 문화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동일집단이 이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별개의 정치체, 고분들이 입증 

함평관내의 옹관묘는 지석묘와 마찬가지로 크게 2개의 권역으로 나누어지는 분포상을 보이고 있다. 즉 함평읍과 엄다면을 중심으로 하는 함평천 일대가 하나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월야면과 해보면, 나산면을 중심으로 한 고막원천 일대가 다른 하나의 중심권을 이루고 있다. 뒤에 등장하는 석실묘에 비해 보다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석실묘 단계보다 사회적 통합이 미약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옹관묘를 뒤이어 5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석실묘도 옹관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함평천 유역의 함평읍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집단과 고막원천 중상류에 해당하는 월야면과 해보면, 나산면 일대를 중심권으로 또 다른 세력을 형성한 집단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함평군의 석실묘는 옹관묘의 경우보다 더 좁은 범위에 보다 밀집된 분포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마한세력의 거점지역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 함평천 일대에서는 함평읍 남쪽의 엄다면을 중심으로 한 함평천 하류 일대보다는 함평읍 장년리를 중심으로 한 주포만과 인근지역이 중요지역으로 부각되고 있고 고막원천 유역에서는 문장리를 중심으로 한 해보면과 월야면 일대가 핵심지역이라는 사실을 살필 수 있다.

독자적인 전통문화 유지해 

그런데 함평지역 석실묘들은 6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형식에 차이가 나타난다고 한다. 곧 뒷 벽쪽이 앞 벽쪽보다 약간 더 넓고 높은 편이며 중앙연도를 취하고 있어 백제의 장방형 평면 석실과는 구분된다는 것이다. 천정 형태 역시 백제 석실묘의 초기에 해당하는 궁륭천정은 찾아보기 어렵고 그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맞조임천정, 평천정에 해당하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일부 맞조임 천정석실도, 벽석을 밖에서 눌러주는 보강석을 별도로 가지고 있는 백제의 맞조임식 석실과는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필 때 산록 경사면에 위치한 월야면 석계고분군과 역시 월야면 신덕 원형고분 등 일부만 백제식 계통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고, 나머지 낮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많은 고분들은 영산강식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있다. 다만, 6세기 중엽 백제식 계통의 고분양식이 보인다고 하여 백제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고 판단하는 것도 성급하다. 6세기 중엽 무렵이면 백제와 마한의 대등한 수준의 통합이 이루어지던 때라서 상호문화 교류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전방후원형 고분의 실체

이는 함평읍 장년리의 장고산 고분, 월야면 신덕고분, 마산면 표산고분 등은 전방후원형 고분형태를 띠고 있는데, 신덕 전방후원형 고분은 발굴조사를 한 결과 백제식이 아닌 영산강식 석실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어디까지나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의 거대한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알게 된 재지 토착세력들이 조영한 고분이었다고 하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하겠다. 영산강유역 정치세력과 왜가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하니와가 출토된 금산리 방대형고분도 누에고치 모양의 잠형 주구를 하여 반남 신촌리 9호분, 해남 용두리 고분과 함께 영산강유역의 고유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길이 51m, 높이 9m의 금산리 방대형고분, 역시 51m, 높이 5m의 신덕고분은 각각 고분의 피장자 집단이 함평천 및 고막원의 정치적 수장일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재지세력의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면서도 영산지중해의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공통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구체적으로 마한 54국 명칭에 비정할 만한 근거는 찾기 어려우나 지석묘 분포상으로 볼 때 오래 전부터 정치체를 형성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글=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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