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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의병들의 구국충혼을 기리자

8·15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5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홍일점 여성의병이 영암에서 탄생했다. 금정면 출신 양방매(1986년 작고) 여사가 바로 그 분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양방매 여사가 여성의병으로 건국포장을 받게 되기까지는 항일의병 연구에 평생을 받쳐온 지역의 원로 향토사학자 신희범씨(작고. 덕진면 운암리 3구)의 끈질긴 노력 끝에 이뤄진 값진 결과였다.

그녀의 기구한 삶의 시작은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막 삼켜질 무렵이었다. 양 여사는 이때 남편 강무경 의병장(1910년 작고)을 만난다. 전북 무주 출신의 강 의병장은 함평에서 심남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유격전에 유리한 금정면 산간지역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의병부대가 주둔한 본거지는 바로 양 여사의 집이었고, 이때 그녀의 나이 18세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그녀는 금정면 남송리 반계마을 양덕관의 6남매 중 둘째딸이었다.

이때 강 의병장과 눈이 맞아 사랑을 싹 틔웠던 양 여사는 부모의 허락으로 결혼을 했고, 곧이어 남편을 따라 나서게 됐다. 일본군이 대병력을 풀어 토벌전을 벌이게 되자 남편은 여자가 따라 나설 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했지만 신부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남편,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의병이 되어 나섰던 것이다. 당시 오빠(성일)도 20세의 청년으로 의병에 가담했다.

이듬해 1909년 10월 9일 화순군 능주면 바람재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될 때까지 1년 동안 양 여사는 남편 부대의 일원으로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지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의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결국 남편 강무경은 대구형무소에서 1910년 7월 32세의 나이로 처형됐고, 결혼한 지 2년도 못된 양 여사는 가까스로 살아났으나 스무살 과부로 자식 하나 없이 혼자 남게 됐다. 주위에선 개가를 권하기도 했으나 역시 의병으로 병사한 큰오빠의 딸 등 친정집에서 조카들을 키우며 의병장 강무경의 아내로 끝까지 수절했다.

그런데 그녀의 생가가 오래전 없어지고 터마저 안내판 하나 없이 잡초만 무성하게 자란 채 잊혀져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마침, 전라남도에서 호남의병의 구국충혼을 기리고 의병 역사를 정립하기 위한 ‘호남의병 역사공원’을 추진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라를 위해 몸바쳐온 영암출신 선각자들의 유적보존과 활용에 각별한 대책이 요구된다 하겠다.

영암신문  yasinm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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