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85>영산 지중해의 玉(下)

우리나라는 고대 유리구슬에 관한 한, 동양에서 가장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에 있는 마한인들이 옥(玉)을 금은(金銀)보다 진귀하게 여겼다는 기록은, 이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엄청난 옥 유물에서 입증되고 있다. 이는 옥을 경식(頸飾)과 흉식(胸飾)으로 사용하였던 마한인들의 복식문화와 여인들이 그들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머리 장식에도 옥을 사용하였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된다.

이제까지 많은 연구는 유리구슬과 같은 옥 유물들이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았다. 즉  교류를 통해 수입되었다는 것이다. 영산지중해를 통해 완제품이 수입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지만 출토된 엄청난 옥 유물들의 규모를 볼 때, 그 많은 옥들이 전량 수입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보성의 석평 유적에서 자체 수정 공장을 두어 현지에 필요한 유리구슬을 조달하였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각 연맹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옥은 청동기시대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고대 유리구슬의 성분을 살펴보면, ‘납-바리움 유리’, ‘칼륨 유리(포타쉬 유리)’, ‘소다유리’, ‘납유리’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유리구슬들이 나타난 것을 철기시대 이후로 살피고 있다. 즉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납-바리움 유리’로부터 시작되었던 우리나라 고대 유리 사용이 기원 후 1세기 무렵 칼륨유리와 소다유리로 만든 유리구슬이 활발하게 유입되면서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漢)왕조시기에 유입되었던 칼륨 유리에 이어 기원후에 등장하는 소다 유리는 해남 군곡리에서 출토된 초록색 대롱옥 유물이 시초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000년 경 옥을 사용한 흔적이 전남 남해안의 출토 유물에서 확인되고  있고, 영암 망산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옥 유물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철기시대 이전에 이미 옥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대롱옥은 마한을 대표하는 장신구였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자료로 충남 부여에서 출토된 푸른색 원통형 대롱옥 구슬이 있다.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유리구슬이 모두 긴 원통형으로 동검, 다뉴세문경, 동탁 등 한국식 동검문화와 함께 출토되었다. 유리구슬이 다른 청동유물과 함께 출토되는 것을 가지고 중국 동북쪽에서 한반도로 전해지는 철기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유리제 대롱구슬은 우리나라에서 청동기시대에 많이 쓰인 벽옥제 대롱구슬을 본 따 유리로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이외에 다른 지역에서는 별로 찾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영암 망산의 옥제품이 청동기 시대로 편년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유리제 대롱구슬은 중국의 영향과 무관하게 이 지역에서 자체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말하자면 초록색 대롱옥 유물은 마한지역에서 생산된 고유의 구슬제품이라 하겠다. 대롱옥 구슬이 마한지역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겠다. 대롱옥이 마한을 대표하는 장신구였던 것이다.
   
대롱옥은 마한의 심장부 영산지중해 입증


그런데 금강유역에서 출토되는 구슬들은 그 종류가 곡옥, 조옥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영산강유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대롱옥, 금박 구슬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한을 대표하는 대롱옥이 금강유역에서는 출토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영산강유역의 분구묘에서는 적어도 1점 혹은 2점의 대롱옥이 대부분 유구에서 확인되고 있는 등 대롱옥과 유리구슬의 조합은 이 지역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특히 같은 마한영역이라 하더라도 영암과 나주, 무안지역 등 영산지중해 일대에서 유난히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시종 옥야리·신연리 고분군, 나주 복암리 3호분 등에서 출토된 옥들이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유행하였던 대표적인 대롱옥이 영산강유역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의 대표적 장신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금강유역에서는 조옥+구슬의 조합체계를 특성으로 하고 있는 반면 영산강유역에서는 대롱옥+구슬의 조합체계가 두드러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이와 같이 마한을 대표하는 대롱옥이 영산지중해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마한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마한의 심장이 이곳 영산 지중해였던 것이다. 마한세력이 백제에 밀리어 영산강유역에 터전을 잡았다는 주장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하겠다.
  
독자적 마한문화 특질을 보여준 대롱옥

한편 일본 큐슈의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에서 나온 여러 개의 푸른색 유리 대롱구슬은 한반도로부터 전해진 문물로 간주되고 있다. 영산지중해를 통해 마한의 대롱옥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겠다. 이와 비슷한 대롱옥이 중국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를 가지고 중국에서 제작된 대롱옥이 마한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대롱옥이 영산지중해의 마한을 대표하는 고유의 장신구임이 분명하다 할 때, 오히려 마한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출토된 옥들을 보면 그 색상이 적색계 또는 감청색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 유리구슬의 색상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색상이 각 지역의 기호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러한 색상의 차이를 각 지역 정치체들이 권역별로 유통에 관여한 증거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해가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지역 또는 특정 고분에서 나타나는 색상의 차이는 단순히 유통문제를 떠나 정치체나 고분 피장자의 성격을 헤아리는데 시사점을 제공해준다고 믿는다.

영산강유역 분구묘에서 확인된 유리구슬을 보면, 시종 신연리 9호분처럼 적색계 유리구슬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감청색계와 녹색계 유리구슬 일색이다. 금동관이 출토된 신촌리 고분의 4천점이 넘는 옥 대부분이 감청색과 녹색계를 이루고 있다. 영산지중해 일대는 주로 감청색 계통을 선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시종과 반남지역이 같은 문화권이라는 사실을 살필 수 있겠다.

말하자면 시종천을 중심으로 시종·반남지역 정치체가 하나로 결합하여 ‘내비리국’이라는 연맹왕국을 형성한 역사적 사실이 구슬의 색상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고 믿어진다. 그런데 적색계 유리구슬이 출토된 유구에서는 감청색계 유리구슬이 어느 정도 확인되나, 감청색계 유리구슬이 확인된 유구에서는 적색계 유리구슬이 한 점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적색계 유리구슬에 대한 배타적 성격이 강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를 배타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영산지중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 고유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하겠다. 백제의 묘제인 토광묘와 석축묘에서 일부 감청색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여 영산지중해 일대에서 감청색 계통의 구슬이 출토된 사실을 가지고 백제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으로 연결시켜보는 의견도 있으나, 신촌리 고분은 석실분이 아닌 옹관묘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이 옳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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