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표지판 하나 없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역사가치 매우 높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폐허로 남겨진 양방매 생가터 18세 때 전북 무주출신의 강무경 의병장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남편과 함께 여성의병으로 활동했던 금정출신 양방매 할머니는 결혼한 지 2년도 못돼 스무살 과부로 자식 하나 없이 혼자 남아 친정조카의 보살핌을 받으며 금정면 남송리 생가에 살다 1986년 96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지금은 생가가 헐리고 몇 그루의 나무가 잡초와 함께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다. 아래 사진은 1984년 8월 광복절을 맞아 94세의 나이로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남편 강무경의 묘소를 찾은 국내 최초의 여성 의병 양방매 할머니의 생전 모습.

 

전남도가 호남 의병의 구국 충혼을 기리고 의병 역사를 정립하기 위한 ‘호남의병 역사공원’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구한말 최초의 여성의병으로 18세 때 남편인 강무경 의병장과 함께 항일 유격전을 펼쳤던 양방매(梁芳梅 1890~1986) 할머니의 생가 터가 안내판 하나 없이 잊혀져가고 있다.

양방매 할머니의 출생지인 금정면 남송리 반계마을에는 1910년 대구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남편을 뒤로하고 고향인 이곳에서 평생을 홀로 지낸 생가가 30여 년 전까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양방매 할머니의 생가 터에 몇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을 뿐, 표지석은 고사하고 안내판 하나 없이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텅 빈 마을과 함께 적막감만 안겨주고 있다.

금정면이 고향인 김오준 시인은 “여성 항일투사라고 하면 유관순만을 기억할 정도다. 그만큼 예전에는 여성의 지위가 낮고 사회참여가 제약받는 시절이어서 여성 항일투사들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미흡한 부분이 많아 우리에게 기억되는 여성투사가 적다”면서 “최초의 여성의병인 우리지역 양방매 할머니의 관련 유적보존과 복원 등은 한국여성 독립투사들의 재조명과 함께 역사와 여성교육에도 이어지는 소중한 일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남편인 강무경 의병장과의 전장에서 꽃핀 사랑의 이야기도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어 일반인에겐 감동을,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창작을 위한 영감을 줄 것이기에 이야기가 남아있는 공간으로 얼마든지 활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양방매 할머니는 의병장 강무경의 부인으로, 1908년 18세가 되던 해에 남편을 따라 의병활동에 투신했다. 강무경 의병장은 전북 무주 출신으로 심남일과 함께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 영암으로 이동했을 때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의 집에 유숙하며 그의 딸인 양방매와 인연이 되어 결혼했다. 당시 강무경은 여자가 따라나설 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남편의 만류를 뿌리치고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섰다. 이때 오빠였던 양성일도 의병에 가담했다. 1909년 3월 8일 강무경 의병부대가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다수의 일본 군경을 사살한 거성동 전투에도 참전했다. 1909년 10월 9일 일제의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화순군 능주면 바람재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1년여 동안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지까지 산악지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함께 했다.

1910년 9월 1일 남편 강무경 의병장은 고초를 겪다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했으며 양방매는 어린 여성임이 참작되어 석방된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남편과 함께 죽지 못한 것이 한”이라며70여 년을 자식도 없이 홀로 여생을 보내다 1986년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양방매 할머니는 2005년 국가보훈처로부터 뒤늦게 건국포장에 추서돼 남편 강무경 의병장과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한편 전남도는 호남 의병들의 충혼을 기리고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국도비 등 13억원을 들여 33만㎡ 부지에 기념관·전시실·테마파크·상징조형물 등이 들어서는 ‘호남의병 역사공원’을 시·군 공모사업에 의해 조성할 계획으로, 기본계획 연구용역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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