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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은 마한 문화권을 상징하는 열쇠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84>영산지중해의 ‘옥(玉)’(中)

필자는 최근 나주에서 마한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로 구성된 ‘마한역사문화포럼’이 주최하고 나주 공공도서관이 주관한 세미나에 초청되어 ‘마한사 연구현황과 새로운 접근’이라는 주제의 특강을 하였다. 도서관장·나주문화원장을 비롯하여 많은 포럼 회원들이 봄비가 쏟아지는 궂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감명을 받았다.

필자의 지론인 한국 고대사의 원류가 영산강유역 마한사이고, 그 중심지에 해당하는 나주·영암 지역민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데 공감을 하였다. 백제 중심의 마한사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활동은 마한 중심의 한국 고대사를 찾는데 원동력이 되리라 확신한다.
 
우리나라 원료로 만들어진 대롱옥

앞서 일본에 전해진 玉문화 뿌리가 한반도에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대표적인 ‘관옥(管玉 :대롱옥)’이 마한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관옥 제작풍습은 청동기시대 이래 철기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의 전통이었다. 부여 합송리 유적에서 출토된 관옥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였던 벽옥제 대롱구슬을 본떠서 국내에서 제작한 것이다. 중국에서 유입된 유리 원재료를 가지고 국내에서 다시 녹여 玉으로 만들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무렵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보령지역 출토 유리구슬의 경우, 같은 시기 중국에서 출토된 유리와 성분이 다르다는 주장이 있다. 유리에 사용된 납의 산지가 남한지역이라는 의견도 있다.

곧 중국에서 유리 제작이 이루어지던 기원전 5세기 무렵 한반도에서도 이 지역에서 생산된 원료를 가공하여 유리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마한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영산강 유역을 비롯하여 보성강유역 등 전남의 여러 곳에서 무수히 많은 구슬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많은 구슬들을 만드는데 필요한 원료를 모두 수입에 의존하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때로는 원료를 수입하여 가공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우리 내부에서 생산된 물질을 보다 많이 이용하였다고 보는 까닭이다.

한편 玉유물이 나온 분묘들을 살펴보면, 백제 영역에서는 충남 미호천 일대, 그리고 차령 이남 마한의 대부분 지역, 그 중에서도 영산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백제계통의 석실분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금강중류 지역에는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유물이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히 남아 있는 공주지역의 고분에서 玉유물이 한 점도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같은 수계에 해당하지만 하류지역에 위치한 석실분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玉이 출토되고 있다. 같은 백제식 석실분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玉 출토여부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마한 분구묘서 나온 부장품의 玉

반면 마한의 대표적인 묘제인 분구묘에서 玉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옹관묘인 영암 옥야리 고분의 6호 석실에서 관옥구슬 331점, 14호 석실에서 관옥 및 조옥구슬 327점, 나주 복암리 3호분의  3호 석실에서 관옥구슬 95점·구슬 108점, 96호 석실에서 관옥구슬 460점이 확인되었다.

또 다른 마한의 토광묘에서도 상당한 양의 玉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영암 만수리 4호분의 3호, 7호 석실에서 각각 구슬이 86점, 76점이 나오고 있는 것이 그 예라 하겠다. 이처럼 현재 확인되고 있는 玉 유물의 4분의3 분량이 마한분묘에서 확인되고 있다. 마한의 묘제에서 옥유물이 대량 나오는 것은, 옥 부장풍습이 마한의 중요한 매장의례의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마한의 분묘유적 대부분에서 다량의 玉 유적이 확인되고 있지만, 백제의 분묘유적에서는 玉이 극히 한정된 유구에서만 확인되고 출토량도 많지 않다. “마한인들은 玉을 金銀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귀하게 여긴다”는 삼국지 위지동이전 내용이 역사적 사실의 반영임을 알 수 있겠다.
 
백제 변경에도 玉 유물 확인

그런데 玉 유물이 나온 미호천 지역과 금강하류 지역, 나오지 않은 금강중류 지역 모두 같은 백제의 영역에 속한다. 같은 백제영역 내에서 이처럼 玉 출토 차이가 발생한 까닭이 무엇일까? 금강중류 곧 玉 유물이 나오지 않은 곳은 백제의 중심세력이 있는 곳과 가깝고, 玉 유물이 나온 미호천과 금강하류 지역은 백제의 변경지역이라는 사실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변경지역은 백제 중앙 정치의 힘보다 마한의 토착적 전통이 강하여 玉을 부장하는 마한의 풍습이 남아 있었다고 여겨진다. 반면 백제의 중심부 또는 중심부와 가까운 곳은 마한의 전통인 玉 부장풍습이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차령산맥 이남을 경계로 한 범 마한계는 玉을 중시하고 그것을 부장품으로 하는 전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반남·다시들 연맹장의 위용 과시

한편 옹관묘와 토광묘 구분 없이 玉이 고루 부장되는 양상은 서로 비슷하다. 이들 고분은 대체로 100점 이하의 수량을 보이는 유구들이 확인된다. 그러나 나주 신촌리 9호분의 한 석실분에서 무려 2천700여 점의 玉 유물이 확인되고, 정촌고분도 한 석실에서 1천117점의 玉이 출토되는 등 특정 고분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옥 관련 유물이 확인되는 등 고분에 따라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실제 확인되는 정촌고분, 복암리 고분, 신촌리 고분, 옥야리 고분 등 상대적으로 많은 玉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고분들은 그동안 살펴왔듯이 고분의 규모가 왕릉급에 해당하는 대형이고, 신촌리 고분처럼 금동왕관이 출토되고, 정촌고분처럼 금동신발이 출토되는 등 당시 적어도 그 지역 연맹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었던 고분들이었다. 따라서 玉 유물의 출토량을 통해 그 고분의 피장자가 적어도 그 지역의 국왕이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다. 이처럼 玉을 통해 마한 정치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각 지역의 출토관옥을 길이와 지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관옥의 크기가 출토된 곳에 따라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말하자면 마한 여러 지역에서 확인되는 玉유물이 특정지역에서 전문적으로 생산하여 유통된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생산시설을 두고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보성 석평 유적에서 수정공장이 마을에 별도로 있는 것도 이러한 짐작을 하게 한다.

그렇지만 금은(金銀)보다 진귀한 다양한 형태의 玉이 특정 고분에 수 천 여 점이 들어갔다는 것은 한 지역에서 모든 玉 제품이 공급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말하자면 당시 최고 권력자들은 현지 玉 공장에서 자체 가공 생산된 제품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지역으로부터 필요한 수량을 추가로 공급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것은 구매 또는 공납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편 분구묘에서는 비취곡옥을 비롯한 수정제·천하석제·공작석제 곡옥, 벽옥제·골제·토제 관옥, 그리고 마노제·유리제 구슬 등 다양한 玉이 확인되고 있지만, 주구토광묘는 모두 구슬만이 부장품으로 확인되는 등 차이가 있다. 같은 玉 유물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조옥과 구슬이 조합되는 특징이 나타난 금강 서남부 지역과 관옥과 구슬이 조합을 이루는 영산강유역의 분구묘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종합하여 다음호에 자세히 살펴보겠다.<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 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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