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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바다 몽해와 김완 장군
서일환

서호면 산골정마을 生
전 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광주전남의료발전협의회 회장
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지화자 좋구나
서호강 몽해들에 풍년이 온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

‘영암아리랑’ 노랫말에 몽해마을이 나온다.

‘영암 아리랑’은 1972년 백암이 작사하고 고봉산이 작곡하여 17세 소녀 하춘화가 노래한 영암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대중가요이다.

‘꿈바다’라고 부르는 몽해(夢海) 마을은 450여 년 전에 김극조의 부인 천안 전씨가 호랑이가 달려들면서 바닷물이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꿈을 꾸고 김완(金完) 장군이 태어난 전설에서 유래됐다.

몽해 마을은 학산면 독천마을과 군서면 구림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에는 꿈바다 또는 구음평(九音坪)이라고 하였다.

김극조(金克祧)는 전남 영암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가 되었다. 광양 현감을 지내다가 이성 현감으로 옮겼다.

광양 현감 한덕수(韓德脩)는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김극조를 무고했다.

김극조는 의금부에 끌려가 고초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사면됐다.

김극조는 출옥 전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한덕수는 무고죄로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김완이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상여 길을 가로막던 호랑이 입에서 뼛조각을 꺼내주었다.

호랑이가 옷자락을 물고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가서 아버지를 모셨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김완은 영암군 서호면 몽해 마을에서 태어나서 약관 20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가 되었다.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책록됐다.

아버지의 3년 시묘살이가 끝나자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 남원으로 한덕수를 찾아가 화살을 쏘았으나 실패했다.

또다시 한양으로 한덕수를 찾아가 화살을 쏘았으나 실패하고 투옥됐다.

김완은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선봉장이 되어 정충신 장군과 함께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진무공신에 책록되어 금궤철권(金匱鐵卷)이 하사됐다.

김완은 전라우수사와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고 병을 얻어 고향 영암으로 돌아와서 사망했다.

김완은 해남군 계곡면 선진리에 묻혔다가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으로 이장됐다.

인조로부터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고 영조로부터 양무공(襄武公) 시호(諡號)를 받았다. 학성군은 왕족이나 공신에게 주었던 작호이며 양무공은 죽은 자의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이름이다.

김완의 아버지 ‘김극조’는 종6품 이성 현감을 역임하여 학천군(鶴川君)에 봉해지고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김완은 종2품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여 학성군에 봉해지고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김완의 아들 ‘김여수’는 정3품 오위장을 역임하여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지고 호조판서에 추증됐다.

김완의 손자 김세기는 종2품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여 학림군(鶴林君)에 봉해졌다.

학천군 김극조, 학성군 김완, 해성군 김여수, 학림군 김세기 등 4대가 봉군(封君)이 되었다.

김완이 태어난 영암군 서호면 화소 마을에는 불천위로 인정받은 부조묘(不祧廟), 보물 1305호로 지정된 영정을 모신 구고사(九皐祠),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부조묘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불천위로 국왕의 허락을 받은 사당이며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고관의 무덤 앞에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김완의 묘지 앞에는 종2품 이상의 고관의 무덤 앞에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우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또한 주인이 세상을 떠나자 울부짖다가 쓰러져 죽은 애마를 묻은 준마총(駿馬塚)이 있다.

서일환  yasinm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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