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83>영산지중해의 ‘玉’(上)

고분구조나 토기중심의 연구는 한계

과거 인간의 삶을 연구하는 역사학에서 문헌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거의 없는 경우 유적ㆍ유물은 과거 역사를 복원하는데 도움을 준다. 유적·유물 발굴은 고고학자의 몫이지만, 그것이 발산하는 수많은 흔적에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는 것은 역사가의 책임이다.

고분발굴이 고고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분은 그 양식을 통해 시대의 특성을 읽을 수 있고, 출토유물은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 양식의 변동 양태를 파악함으로써 시대흐름을 살피려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 고분구조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분이 발산하는 다른 특징들을 찾아내려는 작업은 더욱 긴요하다.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완전한 형태의 소뼈를 가지고 당시 순장풍속을 알 수 있는 증거로 해석하거나, 나주 정촌고분의 금동신발 뒤꿈치에서 묻어져 나온 파리 유충을 통해 복장(複葬) 풍습을 짐작하는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추론을 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고학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 발굴이 마무리된 경우는 발굴 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내어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마한사회의 특질을 밝히는 구슬

이제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출토 토기에 주목하였다. 토기의 특징을 분석하여 당시 사회의 모습을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생활용품인 토기는 가장 많이 출토되는 부장품이기 때문에 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고분 출토유물은 토기뿐만 아니라 구슬(玉)·마구·무기류·생활도구 등 종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수량 면에서도 구슬(玉)은 고분에 따라 토기보다 더 많이 출토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많은 연구들이 토기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옥(玉)과 같은 다른 유물들은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필자는 마한관련 발굴 보고서를 검토하다 ‘玉(구슬)’이 대부분 고분 또는 일반 유적지에서 출토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성강 중류지역 석평유적에서 유리구슬 및 그것을 제련한 공장유구까지 발견되었고, 영암 시종 옥야리·신연리·내동리 등 영산강유역의 모든 고분에서 구슬이 출토되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최근 금동신발이 출토되어 많은 사람들을 깜작 놀라게 한 복암리 정촌고분의 한 석실에서는 무려 1천117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구슬이 출토되었다. 마한의 핵심지인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구슬이 대거 발굴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마한지역과 ‘옥’ 문화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음의 기록이 이러한 궁금함에 답을 던져주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韓傳에 “(그 나라 사람들은) 구슬을 재보(財寶)로 삼아 옷에 매달아 장식을 하거나 목이나 귀에 매달지만, 금은과 비단·자수는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以纓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懸頸垂耳 不以金銀繡爲珍)”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대개 ‘韓’을 ‘삼한’으로 살펴, 삼한에 관한 사실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내용이 ‘진서’ 열전에는 ‘마한’조에 나와 있다고 하였다. 곧 삼한 중에서도 ‘마한’ 지역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영산지중해는 물론 보성강유역까지 ‘옥’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것은 당시 마한사회에서 ‘옥’이 가장 선호하는 보석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들 지역에서는 구슬을 다양한 장신구로 이용하고 있었다. 옷에 매달기도 하고, 목걸이, 심지어 귀걸이까지 ‘옥’으로 만든 제품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특히 복식에 있어서 경식(經飾)과 흉식(胸飾)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장신구는 선사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변화·발전하였다. 선사시대에는 대부분 자연에서 얻은 조개나 뼈 등을 가공하여 장신구로 사용하였으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가공기술이 발달하고 소재가 다양해지면서 광물이나 금속, 인공 장신구의 제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장신구는 단순장식의 의미뿐만 아니라 계급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이용되어 당시 사회의 정치·경제적 문화양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옥은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확인된다. 청동기시대에는 천하석제와 벽옥제로 대표되는 다양한 형태의 옥이 청동·석제·골각제 장신구와 함께 사용되었다. 옥은 구슬, 관옥(管玉대롱옥), 곡옥(曲玉), 다면옥 등 여러 형태로 분류되고 있다. 구슬은 유리제로 된 환형과 관옥형이 있고, 색상은 크게 초록색과 파랑색 계열로 구분된다. 관옥과 곡옥은 대부분 조합 관계를 보이며 확인되고 있다.
 
구슬 패용은 수장층일 가능성 높아

마한사회에서 금·은보다 더욱 진귀한 보물로 여겨졌던 구슬이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대량 발견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옥이 진귀한 보물이라면 그것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착용하거나 패용한 사람은 그곳 정치체의 수장이거나 그와 버금가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정촌고분 1호 석실에서만 무려 1천117점이나 출토되었다는 것은 그 고분의 주인공이 적어도 지역 연맹체의 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금동신발과 함께 고분의 주인공의 지위를 살피는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따라서 옥이 출토된 지역과 수량, 옥의 특징 등을 분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한 정치체의 성격을 살필 수 있는 단서가 나오리라 믿는다. 필자가 마한지역의 玉을 검토하려는 이유이다. 

구슬은 국산품일 가능성이 높다

전남지역에서 대량 출토되고 있는 옥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를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대표적인 ‘옥’에 속하는 ‘곡옥’이 일본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논리를 발전시켜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에서 곡옥과 같은 옥이 많이 출토되는 것은 이 지역이 과거 임나일본부 관할 지역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玉이 중국이나 왜에서 반입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국내 학자들은 ‘곡옥’을 마한과 왜의 문화교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반월형, 어형(魚形) 곡옥이 일본열도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을 받아 성립된 왜의 두첨형(頭尖形), 원두어형(圓頭魚形) 곡옥이 다시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옥 문화가 일본에 먼저 전파되었고, 그곳에서 꽃을 피운 옥 문화가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옥’ 문화의 뿌리는 한반도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주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계속>                     
(문학박사, 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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