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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낙랑과 기원전부터 교역했던 영산강유역 마한의 정치체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82>대외교역으로 확인된 마한의 실체
  • 글=박해현 박사(초당대 겸임교수)
  • 승인 2019.04.2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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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부터 7일까지 4일간 열린 ‘2019영암왕인문화축제’에 100만여 명이 참여하여 축제가 시작된 이래 최대의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금년 축제가 대성공을 거두게 된데는 축제기간 날씨가 좋아 벚꽃이 만개하였다는 요인도 있었지만, ‘왕인박사’라는 지역을 상징하는 모티브를 설정하고 그것과 연관된 다양한 축제요소를 가미한 것이 결정적 이유임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영암지역의 축제가 보다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마한의 심장 영암’이라는 보다 큰 주제를 염두에 둔 콘텐츠를 개발하는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영산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영암지역이 고대 ‘마한 르네상스’의 중심지임을 부각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종지역의 마한역사공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온 군민들의 역량을 모아야 할 때라 생각한다.
앞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을 바탕으로 출토된 점토대 토기들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며 늦어도 기원전 4∼3세기에 마한이 성립되어 있음을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영산강유역에서 많이 출토된 옹관고분을 가지고 마한사회의 성립시기를 살피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옹관고분이 영산강유역의 특정시기 마한사회의 특성을 설명하는 수단일 뿐, 그것을 가지고 ‘마한사회의 성립-발전-소멸’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옳은 접근이라 할 수 없다.

기원전 훨씬 이전에 성립된 마한지역의 여러 정치체들이 다른 지역의 정치체들과 교역을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를 살핌으로써 마한 연맹왕국의 실체를 파악할 수도 있겠다.
 
영산지중해 일대 기원전부터 교역 중심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마한 연맹체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에 “대방군에서 왜로 가는 길은 해안을 돌아서 가는데 ‘韓’을 경유하여 남쪽이나 동쪽으로 가면 왜의 북쪽 구야한국에 접해있고 칠천 여리다.

거기서 시작하여 바다를 건너 천 여리 떨어진 곳에 있는 대마국에 이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왜에서 낙랑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마도를 거쳐 남해안에서 서해안 연안항로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남해안의 늑도와 서남해안에 있는 해남 군곡리 일대가 중간 기착지로 이용되었음을 그곳 패총에서 출토된 복골(卜骨), 화천(貨泉), 칠기류 등에서 살필 수 있다. 해남반도에 자리 잡은 ‘침미다례’는 이러한 중개무역을 바탕으로 마한의 대국으로 발전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서남해안을 경유하여 서해로 가는데 영산지중해 일대가 또 다른 경유지로 주목되고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에 “천 여리를 가면 대마국에 도착한다. (중략) 좋은 농지가 없어 해물을 먹으며 자활하고 배를 타고 남쪽과 북쪽으로 다니며 양식을 구입한다.

또 남쪽으로 바다 하나를 건너 천 여리를 가면 큰 나라에 도착하는데 (중략)농지가 조금 있지만 경작해도 먹기에는 여전히 부족하여 또한 남쪽과 북쪽으로 다니며 양식을 구입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식량이 부족한 왜인들이 주변 지역으로 식량을 구하러 다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왜인들이 주로 이용한 곳이 광주 신창동 일대의 비옥한 곡창지대였다.
 
쌀을 매개로 대외교역을 장악하다
영산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신창동 유적은 당시 가장 발전된 농경 생산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곳 저습지에서 확인된 두꺼운 벼 껍질 층은 중국 하모도 유적을 능가하는 것으로, 이 지역의 농업 생산력이 동아시아 최대 규모이며 농업기술도 선진적인 단계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영산강 일대는 기원전 3000년 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나주 다시들 가흥리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도작산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

신창동을 비롯하여 비옥한 영산강유역에서 왜인들이 필요한 식량을 수입하였다고 하는 것은 광주 평동 지역과 신창동 지역에서 출토된 야요이계 토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신창동 저습지에서 늑도 출토품과 유사한 야요이계 토기들이 삼각형 점토대토기와 함께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왜계 토기들은 일찍부터 왜인들이 이 지역과 교역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때의 교역은 단순한 상인들 간의 사적인 거래라는 성격도 있겠지만, 그 지역의 물산이 집중되는 당시의 정치·경제적 중심지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영산강유역의 재지 수장들이 쌀과 같은 교역품목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을 것이다.
   
교역을 통해 확인된 마한 연맹체들

광주 복룡동에서도 화천(貨泉) 50여 점이 출토되었다. 화천은 기원 후 14년 왕망이 세운 ‘新’에서 주조되어 40년까지 통용된 화폐로, 이것의 발견은 서남부지역 정치체가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한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화천과 같은 화폐들이 주로 교역로 상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교환수단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말하자면 낙랑과 영산강유역 정치체가 직접 교역하는 흔적으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출토된 화폐가 꾸러미채로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 정치체의 수장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는 위신재로써 낙랑에서 수입된 것이 아닌가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곧 연맹체가 존재하였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말하자면 기원전부터 이미 이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이들 지역에 존재하는 정치체는 당연히 ‘韓’으로 기록에 나오는 마한 연맹왕국의 하나였을 것이다.

준왕이 금강을 통해 전북지역에 들어왔을 때 이미 ‘韓’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韓’에서 진한, 변한이 갈라지고 있는 것을 볼 때 ‘韓’은 마한이 분명하다.

따라서 교역을 통해 확인되는 정치체들은 이러한 마한에 속한 연맹왕국의 하나였을 것이다.

기원전 4세기 고조선계 주민의 이주로 발전된 청동기 문화가 유입되고 이어 기원전 2세기에도 준왕의 남하로 본격적인 철기문화가 유입되었던 금강, 만경강 일대는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더 이상 대외교류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고 유적도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반면 기원전 3세기까지의 유적이 간헐적으로 확인되다가 기원전 2세기 이후부터 급증하고 있던 영산강·서남해안 지역은 기원전 1세기에 들어 중국-한반도-일본열도를 연결하는 해상교통로를 통해 활발히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음이 유적·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충청도 일대 마한세력의 발전이 주춤한 것은 漢과 가까이 있어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그렇지만 영산지중해 일대가 당시 교역로상의 중심지에 위치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지 않나 한다.

결국 기원전 3, 4C 경 고조선과 교류를 하며 보다 선진문화를 접하였던 영산강유역의 마한 정치체들은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서해연안 항로를 통해 낙랑 등 한 군현 및 왜 등 외부세력과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사회를 발전시켰던 것이다.<계속>

 

글=박해현 박사(초당대 겸임교수)  yasinm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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