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81>한국 고대사 원류(源流)를 형성한 영산강유역 마한사

최근 국회에서 마한을 배제한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4개 문화권을 대상으로 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 발의돼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경주 대릉원을 능가하는 영암 시종 옥야리와 나주 반남 일대의 대형고분과 ‘영산강식 토기’ 등은 고대 마한의 중심지가 영산강 유역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사진은 마한왕국의 위용을 실증하고 있는 신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왕관과 정촌고분의 단경구호(오른쪽 작은 사진).

마한사 배제한 특별법 있을 수 없어
최근 경남 김해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국회의원이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다. 

그런데 법안을 보면 ‘마한’을 배제한 채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4개 문화권을 대상으로 삼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가야사와 마한사 연구를 영·호남 상생 차원으로 접근하려 한 우리지역의 선의가 얼마나 순진한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우려는 이미 필자가 언급하였듯이, 우리지역에서 출판된 역사교과서에 마한 관련 내용이 누락될 때 충분히 예견되는 바였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에 고대 마한의 중심지가 영산강 유역이었음을 강조한 필자의 평소 지론을 재차 밝힘으로써 마한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근거로 삼게 하고 싶다.


 시종·반남 고분군들이 마한대국 입증
영산강유역의 대형고분을 보고 백제에 버금가는 정치체가 있었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였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백제에 맞섰던 '침미다례'가 그곳에 있었지 않았을까 정도의 상상만 하였을 따름이었다.  영산강유역에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말한 마한의 大, 小 여러 토착 연맹세력들이 소국을 형성하여 있었다. 

즉 해남·강진 일대에 ‘침미다례’, '영산지중해'의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지역에 ‘내비리국’, 영암지역에 ‘일난국’, 다시들 유역에 ‘불미국’과 후에 ‘응류(응준)’라는 마한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정치체들이 그들이다. 

이들 세력의 힘을 보여주는 근거로 경주 대릉원을 능가하는 대형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영암 시종 옥야리와 나주 반남 일대의 거대한 고분군을 들 수 있다.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의 분석을 통해, 영산강 유역에는 재지적인 문화요소를 바탕으로 낙랑, 백제, 가야, 왜 등 여러 외래 요소가 다양하게 섞여 고유의 특질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성립되었다는 충분한 근거라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마한의 고유한 전통을 과시한 유물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로 백제 토기나 일본 토기와 비교하여 볼 때 뚜렷한 지역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어 일본에서조차 ‘영산강식 토기’라고 부르는 토기를 들 수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만 주로 출토된 토기에서 나타난 ‘집흔’ 자국이 있는 독특한 문양을 가진 토기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무렵에 완성되어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가야 토기라고 알려졌던 승석문 토기 또한 사실상 영산강유역 산으로 확인되고 있는 등 영산강 유역만의 고유한 특징을 지닌 토기들이 영산지중해 일대를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보주가 달린 3단의 가지 장식은 백제나 신라 양식보다는 가야나 왜 계통에 가깝고, 같은 곳에서 출토된 환두대 또한 기본형은 백제형식이지만, 환내도상을 별도로 끼워놓은 것은 대가야 것과 유사한데다 제작기법도 무령왕릉 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아 반남지역에서 자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금동관을 백제 양식으로 해석하여 백제의 영향력 확대로 이해하였던 기존의 연구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재지적인 특징은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토괴 축조양식이 가야계통의 방사상과 일본계통의 원형양식을 융합한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였고, 그것이 다시 가야나 일본으로 전파되고 있는데서 토착성에 기반을 둔 개방적인 요소가 강한 문화의 특징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재지 정치세력의 독자적 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이 지역에 독자적인 연맹왕국이 성립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영산강유역에서 5∼6세기 무렵에 유행한 토기들이 백제 지역에서는 아예 보이지 않거나 설사 보인다하더라도 형식적인 면에서 구별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백제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유개고배, 전형적인 직구단경호, 통형기대 등이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영산강 유역에 소량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출토된 토기만을 가지고 살핀다면, 영산강식 토기들이 지닌 독자적 특질은 적어도 6세기 전반 무렵까지 유지되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때까지 영산강유역에 독자적 정치체가 존속되어 있었다는 앞서의 추론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포용성
영산강유역 정치체들은 유입된 다양한 외래문화를 폭넓게 수용하여 재지적인 특성으로 용해시켜 내고 있었다.

외래계 토기 가운데 가야지역에서 나타났던 광구소호, 약간 늦은 장경소호, 승문타날문 단경호 등이 서남해안 지역에서 4세기 후반부터 가장 먼저 나타나기 시작하여 5세기 전반 무렵에 영암 등 영산강하류 지역으로까지 확대되며 주류를 형성하였다.

특히 5세기부터 나타난 가야계 고배는 전북 고창지역까지 확대되고 있었는데,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광주 장수동 점등 고분에서 대가야계의 유개장경호가, 장성 영천리 고분에서 점열문이 시문된 소가야계의 고배,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 대가야 계통의 모자 모양의 꼭지 달린 개 등이 출토되고 있어 관심을 끈다.
특히 대각이 달린 소가야 계통의 대부호는 재지화가 이루어진 흔적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가야와 관련된 자료는 4∼6세기에 걸쳐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 등으로 계통을 달리하여 나타났고, 점차 기종이나 형식이 재지화되는 경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영산강유역 마한 연맹체들은 가야 연맹체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외래문화를 고유의 전통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나아가 영산강하구에서 점차 내륙 방면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도 살필 수 있어 남원 방면에서 영산강 상류 쪽으로 유입되었다는 일부 주장과 배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5세기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왜계 토기들이 특히 전방후원형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광주 월계동 1호분 전방후원형 고분에서는 수에키 토기 계통의 개배, 고배, 유공광구소호 등의 모방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왜의 하니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통형 분주 토기는 재지화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5세기 후반 무렵의 대규모 도요지가 확인된 나주 오량동 개배의 회전 깎기 기법이 수에키 토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왜와 활발한 교류를 살필 수 있다.

신라계 토기 계통으로는 개와 장경호 등이 있는데, 모두 6세기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주 영동리 3호분 석실묘에서 출토된 신라 계통의 개와 삼족배는 비록 현지에서 제작은 하였다고 하나 소성 흔적으로 보아 신라 지역과 직접 교류를 했던 흔적으로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5∼6세기 무렵 영산강유역에는 가야계와 왜계, 심지어 신라의 성격이 많이 찾아지고 있으나 백제의 흔적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신촌리 9호분 출토 유물에서도 백제계보다는 왜계, 가야계 문화 요소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영산강유역이 이미 기원이전부터 낙랑과 가야, 왜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는 것과 연결지어 보면 이해가 된다. 반면 백제의 흔적이 6세기 이전까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마한남부 연맹과 대치하고 있던 백제가 이 지역에 들어와 있지 못함을 알려준다.
    
한국 고대사의 원형을 형성한 마한사
한편, 백제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충청 이북지역을 장악하였던 목지국까지 복속하며 세력을 확대하자, 영산강유역 정치체들도 차령산맥 이남을 중심으로 ‘마한남부 연맹체’를 결성하며 힘을 키워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성왕이 지방행정 제도를 정비할 때 추가로 편성된 15郡이 모두 노령산맥이남 지역이고, 양직공도의 ‘방소국’에 해당하는 마한의 왕국들이 모두 전남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마한의 중심지는 영산강유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한남부 연맹이 마한의 본류인 셈이다. 마한에서 백제가 나오고, 변한과 진한이 나왔으며, 변한에서 가야가 나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영산강유역의 마한사를 배제한 한국 고대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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