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80>기원전 3, 4세기에 성립된 마한의 역사

광주 신창동출토 점토대토기 기원전 1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철기시대 유물로 결국 전라도 지역의 마한 연맹체는 기원전 훨씬 이전부터 성립되어 있었음을 출토유물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필자는 이제껏 마한남부 연맹 실체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백제의 마한’이라는 기존 인식을 극복하고 ‘마한의 백제’라는 관점에서 마한사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물론 어려움도 적지 않았지만, 마한사를 사랑하는 수많은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여기까지 왔다.

차령산맥 이남의 마한이 그 이북의 마한 연맹체와는 차이가 있음에 주목하였다. ‘침미다례’, ‘비리국’부터 시작된 영산강유역이나 보성강유역의 마한 정치체를 추적함으로써 마한남부 연맹 실체를 찾으려 하였다. 그 결과 노령산맥 이남에 대국 수준의 강력한 연맹왕국들이 위용을 떨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영암 시종 옥야리와 반남지역의 대형 고분군, 반남 신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다시들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등은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특히 복암리 지역에 ‘응준(鷹準)’으로 상징되는 마한남부 연맹을 대변하는 왕국이 있었음을 확인한 것은 망외의 수확이었다. 결국 백제의 마한통합은 흡수통합이 아니라 대등한 수준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였다.
 
 

충남 보령출토 점토대토기.

마한 정치체를 밝히는 것이 과제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함평, 장성, 광양지역 등에도 존재하였을 마한 정치체의 실체를 찾아내야 한다. 마한사를 정치사 측면에서 접근하다 보니 마한남부 연맹의 특질을 밝히려는 노력도 소홀하였다. 가령 마한남부 연맹의 여러 지역에서 무수히 많이 출토되고 있는 ‘옥(玉)’이 지닌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마한사회의 성격을 살피는데 매우 중요하다. 말하자면 문화사적인 접근도 시도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을 차분히 풀어나가려 한다.

영산강유역 마한사의 성립시기를 기원후 3세기 전후로 파악한 것은 잘못이다. 이를 살피기에 앞서 마한사, 차령이남의 마한사, 마한남부 연맹의 역사는 언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이에 대한 논란도 의외로 심각하다. 작년 11월 23일 국회에서 전라남도가 주관한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의 여명과 성립’이라는 세미나의 기조발표가 그 단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발표의 핵심은 옹관고분을 사용한 영산강유역 집단이 왜와 백제의 각축 속에 휘둘리다 생존을 위해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것이다. ‘옹관고분사회’라고 지칭하며 이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독자적인 정치체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않은 채, 영산강유역의 마한사회가 AD 3~5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성립’ 되었고(1단계), AD 5세기 중후반~6세기 전반에 이르러 1세기 남짓 ‘전개’ 되다가(2단계), AD 6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해소’ 되었다(3단계)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한사회의 성립시기를 AD 3세기 이후로 보고 있는 것이다. 기원 전후에 성립되었다는 가야사보다 훨씬 늦게 형성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마한에서 변한·진한이, 그리고 백제가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변한이 발전하여 가야 연맹체가 성립되었다. 가야는 마한의 손자인 셈이다. 마한이 가야보다 늦게 출발하였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라 하겠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은 기원전 3세기 이전

마한은 언제 성립되었을까? 그리고 기존 연구는 왜 마한남부 연맹의 성립시기를 AD 3세기 이후로 살폈을까? 우선 기록을 토대로 살피면, BC 3세기 무렵에 마한이 성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전(韓傳)에 따르면, “(조선의)후(侯)인 준왕(準王)이 함부로 왕을 칭하였다.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에게 공격을 받아 빼앗겼다.(준왕은) 좌우의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의 땅에 거처하였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위만에 쫓긴 준왕이 바다를 통해 ‘한’의 땅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준왕이 내려오기 이전에 ‘한’이라는 나라가 이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준왕이 내려온 것이 BC 194년 무렵이다. 따라서 적어도 그 이전에 ‘韓’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어 나오는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늙은이가 세상에 전하기를 스스로 ‘옛날에 진역(秦役, 진시황의 통일전쟁)을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이 한국에 왔다.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에서, 진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다는 것은 이미 진역 이전에 한국이 곧 마한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마한의 성립시기를 기원전 3세기 전후로 살피는 것이 일리가 있다 하겠다.
 
원형점토대토기문화는 주로 한강유역 중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꾸 마한의 성립시기를 기원후로 늦추려 할까?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마한 정치체의 흔적이 없다는 논리이다. 게다가 영산강유역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는 옹관고분을 가지고 그때부터 마한의 정치체가 성립되었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낙랑계 유물을 비롯하여 수많은 외래문화의 흔적들이 보이고 있다. 곧 이미 일찍부터 정치체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고조선을 대표하는 원형점토대토기가 부여의 송국리 일대에 뿌리를 내리는 시기가 기원전 4~3세기로 보아지고 있다.

즉 기원전 300년에 일어난 연과 고조선의 무력 충돌을 계기로 그 근처에 위치한 요령 점토대토기문화인들의 다수가 한반도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들 고조선인들을 통해 새로운 문물이 한강유역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를 수용한 ‘韓’으로 상징되는 연맹체가 한강유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마한’이었던 것이다.
  
삼각형점토대토기문화는 영산강유역에서
기원전 2세기 무렵 준왕이 남하하면서 연나라에서 주조된 철기가 한반도에 본격 유입되었다. 광주 신창동 유역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철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와 철경부동촉이 그것을 말하는데 낙랑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낙랑계 유물이 변한, 진한을 통해 영산강유역에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영산강 재지세력이 낙랑과 직접적 교류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무렵 중국에서 발달한 삼각형점토대토기 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되고 있다.

특히 삼각형점토대토기들이 금강 이북보다는 영산강유역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준왕으로 상징되는 고조선의 새로운 문화가 금강이남 곧 만경강, 영산강 일대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음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그곳에 있는 또 다른 마한세력과 결합하면서 새롭게 세력을 키워갔다고 보여진다.
 
새 문물을 수용하며 발전했던 마한 연맹체

결국 전라도 지역의 마한 연맹체가 기원전 훨씬 이전부터 성립되어 있었음을 출토유물을 통해 유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말하자면 출토유물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기존 주장이 입론의 근거가 없게 된다. 요컨대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으로 고조선 유민이 한반도로 대거 유입되는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에 마한사회는 연맹왕국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고, 그 후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하여 위만에게 패한 준왕이 서해연안 해로를 통해 전북 만경강 유역으로 남하하면서 연나라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될 때 마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또 다른 변화의 기회가 만들어졌다.

한편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고 漢 군현이 설치되면서 차령산맥 이북에 있었던 마한은 이웃하는 한 군현의 정치적인 간섭으로 성장의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중국-한반도-일본열도를 연결하는 해상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한 영산강유역의 마한남부 연맹의 정치체들은 중개무역을 통해 발전을 거듭하였으니 기원전 1세기~기원 후 2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제 영산강유역의 마한 연맹체들은 한강유역에 있는 마한 연맹체들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에 마한연맹 사회가 성립되었다고 해석되는 중국 측 기록은 당시의 사정을 분명히 살펴주고 있다고 하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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