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79>도선스님의 낙발처(落髮處), 월암사

도선국사 실록에 따르면 도선스님의 낙발사는 ‘월암사’였다고 한다. 현재 월암사는 군서면 월곡리 월암마을에 절터만 남아 있다. 오른쪽 사진은 도선국사 낙발지가 쓰여진 바위.

지난 23일 익산미륵사지 석탑이 20여 년간의 복원공사 끝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본란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거니와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까지 담고 있어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공개되기 직전, 복원공사에 하자가 많았다고 감사원이 발표하였다. 미술사학자는 최고의 복원이었다고 한다. 혼란스럽다.

최근 나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한역사 문화포럼’이라는 단체의 초청을 받았다. 기존 연구가 지닌 문제점을 비롯하여 마한사 전반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필자의 글을 꾸준히 읽으며 마한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었다.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마한사의 미래가 밝게 보였다.

도선의 풍수지리사상은 고려왕조 건국의 이데올로기이자, 고려 중기까지도 왕조의 중요한 정치 수단이었다. 또한 후대에는 민간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는 우리고장 영암출신이다. 이러한 점에서 도선스님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해보려 하는 것이다. 스님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물론, 왕건과 관련된 내용 등이 신이하게 다루어져 있다. 따라서 도선 관련 내용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최유청이 찬한 비문에 “스님의 행적을 그 당시까지 문장으로 전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표현이 있다.

곧 비문이 찬술될 당시 도선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석에 새겨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최유청은 당시 전해지는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찬술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유청이 찬한 비문조차 신이함이 많은데다 후대로 내려오며 이러한 현상이 심해져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전남에 도선과 관련된 사찰들이 많다

이제까지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가 440여년 전에 최유청의 비문을 토대로 구성한 스님의 연대기가 받아들여졌다. 즉, 스님이 영암출신이고, 15세에 ‘월유산 화엄사’로 출가하였으며, 20세까지 화엄학을 공부하고, 23세까지 선종을 수학한 다음 37세까지 방랑 수련을 하고, 72세까지 옥룡사에 주석하다 입적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스님과 영암의 관련성은 유년기만 해당할 뿐 15세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영암 도갑사를 비롯하여 승주 선암사, 화순 운주사 등 전남 곳곳에 스님이 창건하였거나 주석하였다고 하는 사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유청의 비문과 차이가 있어 후대에 도선스님과 부회된 사찰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렇지만 비록 후대의 자료라 하더라도 해당 사찰들에서 스님과 연관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그저 지나칠 수만은 없다고 본다. 특히 스님의 낙발사를 둘러싸고 기존 주장을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운 사례들이 보여 이 문제를 검토해 보려 한다. 이는 이 지역에서 스님의 행적을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도선국사 비문, 도갑사 실록에서 본 낙발처

도갑사에는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는 비(碑)가 있다. 수미대사는 조선 세조 때 도갑사를 크게 중창한 인물로, 도선국사와 수미대사의 공동비인 셈이다. 이 비문은 비교적 근세에 쓰여진 도선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이다. 영조 19년(1743)에 重刊되었다. 초간은 이보다 50년 더 올라가지 않을 듯하다.

비문에 “모친의 성은 최씨이고, 15세가 못되어 월남사(月南寺)에서 낙발(落髮)하고 그후 입당하여 일행선사에게 법을 배운 후 귀국하여 많은 절과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처음 수계를 받은 절이 ‘화엄사’이고, 입당하지 않고 혜철스님에게 공부를 하였다는 부분만 최유청의 비문과 다를 뿐 나머지는 두 비문이 서로 비슷하다.

스님이 ‘월남사’에서 낙발했다는 구절이 주목된다. 최유청은 15세에 ‘월유산(月遊山)화엄사’로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화엄사’를 당연히 지리산 화엄사로 이해하여 구례 화엄사로 출가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필자의 은사이신 김두진 국민대 명예교수도 스님이 대장경을 읽고 문수의 묘지(妙智)와 보현의 수행을 터득한 것으로 볼 때, 그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사를 ‘지리산 화엄사’로 표기하였는데, 왜 ‘월유산 화엄사’로 기록했을까? 의문이다.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이 ‘월유산’이어서 그렇게 살폈는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비문에 “도선이 아직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에 지리산 구령(鷗嶺) 암자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라고 분명히 ‘지리산’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낙발사가 지리산 화엄사가 분명하다면 ‘지리산 화엄사’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지리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월유산’이라고 표현한 것은 ‘월유산 화엄사’는 ‘지리산 화엄사’가 아닐 것이라는 심증을 굳혀준다. 

한편 ‘도선국사 실록’에 따르면, “스님의 낙발사는 ‘월암사’였다” 한다. “월암사(月岩寺)는 월산사의 위에 있는데, 도갑사에서 보면 북쪽이다. 세칭 낙발사를 월남사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 하여 낙발사가 월남사가 아닌 월암사로 보았다. 말하자면 월남사에서 낙발했다는 도갑사 비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세칭’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월남사를 낙발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인의 인식이 잘못이라는 평가를 한 것으로 보아 도선국사 실록이 보다 더 사실에 대한 고증을 바탕으로 정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월남사는 현재 강진 쪽 월출산 기슭에 사찰 터만 남아 있고, 고려후기의 선승 지눌의 제자인 혜심이 창건한 절로 도선과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실록 기록이 보다 타당하게 여겨진다.
 
월암사는 국제무역항 상대포 인근의 대사찰

현재 월암사는 군서면 월곡리 월암마을에 절터만 남아 있다. 현재 비구니인 자현스님이 사찰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최근 발굴된 월암사지에서 고려시대 유물들이 나오고 있어 적어도 당시에는 사찰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통일신라 말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여 통일신라 말에는 없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도선국사 실록에 따르면 도선스님이 낙발할 무렵에 월암사는 소속 암자가 16개에 달하고 스님들이 500여 명이나 되는 대사찰이었다 한다. 국제 무역항 상대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월암사는 수많은 국내외 승려들이 왕래하는 국제적 사찰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월암사가 도선스님의 생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이곳에서 낙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최유청이 말한 ‘월유산 화엄사’는 아마도 월암사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스님은 고향 근처의 월암사에서 낙발한 다음 구례 화엄사에서 본격적으로 화엄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월유산 화엄사는 이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8년, 영암군이 11편의 스님 관련 논문을 모은 ‘선각국사 도선의 신연구’라는 책을 펴냈다. 당시의 연구 역량을 집대성한 것으로, 지금 보아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최근들어 스님에 대한 연구는 그때에 비하여 훨씬 답보상태인 것 같아 안타깝다. 본보의 연재를 계기로 스님의 사상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나아가 월암사가 복원되기를 희망해 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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