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서호면 몽해리 전 목포시 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똘이는 시골집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몸집이 중간 정도인 애완용 개다. 몇 년 전 개장수가 우리 마을 아시내 회관 공터에 강아지 네 마리를 버리고 간 사건을 일으켰다. 똘이는 제일 마지막까지 남겨졌다. 입양할 사람이 없게 되자, 출타한 내게 연락도 하지 않고 우리 집 대문 안으로 누군가 밀어 넣어버려 나와 함께 살게 됐다. 비슷한 사연으로 먼저 들어온 몽이가 이미 우리 집에 있었지만 나는 똘이를 가족으로 맞게 됐다.

몽이는 내가 사는 동네가 행정구역으로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에 속해 있어 몽이라고 지었고, 똘이는 처음에 내게 올 때 작고 다리가 짧아 똘똘하게 자라라고 똘이라고 지었다. 

한번은 몽이와 똘이 둘을 데리고 집 주변을 산책했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작지만 유난히도 짧은 다리 때문에 제법 통통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몽이를 따라가는 모습이 하도 우스워 많이 웃었는데, 두 번 정도 집 앞을 지날 즈음 똘이는 숨을 헐떡거리다 더 이상 가기를 멈추고 산책을 계속하는 나와 몽이를 놔두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혼자 들어가 버리기도 했다. 지금은 몽이보다 더 자라 힘이 장사다. 누나인 몽이에게 한동안 의지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몽이를 돌본다.

난 자주 집을 비운다. 아시내에서 지내지만 아내가 목포에서 활동하는지라 여러 가지 일로 자주 집을 비우게 된다. 내가 집을 비우게 되면 자연 똘이와 몽이가 집을 차지하고, 집을 돌보고, 집을 지킨다. 그래 똘이는 실제로 서호면 몽해리 277-1번지 집의 실소유주나 마찬가지이다.

몇 년 전 시골집을 개축하면서 집을 정리하다 작고하신 아버님께서 심어놓은 수선화를 버릴 수가 없어, 똘이 집 앞에 옮겨 놓았다. 지금은 많이 불어 세 평정도 면적에서 노오랗게 핀다. 수선화는 집단으로 피면 무척 아름답다. 고개를 한 쪽 방향으로 한 수백 그루의 수선화가 필 때면 똘이 집이 아름답게 변한다. 수선화가 똘이를 향해서 피기 때문인지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수선화의 꽃말은 ‘고결’이다. 나는 수선화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신화 미소년 나르시스에 얽힌 구슬픈 신화 때문이 아니다. 45년 전, 보성교육청 청사 작은 화단에 피어있었던 수선화 때문이다. 절대 빈곤의 시절, 난 천신만고 끝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첫 발령받는 학교가 보성군 벌교읍 장암리에 위치한 장암국민학교이다. 영암 집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당시의 교통사정으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집에 올 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안을 돌봐야 되는 나로서는 고향집 근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몸부림치다시피 하여 1974년 4월 1일자 중간 발령으로 부모님이 계신 고향 영암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는데, 마지막으로 보성교육청에 인사를 하고 나오다 청사화단 남쪽 가장 자리에서 너무나도 곱게 피어난 수선화를 보게 된 것이다. 한 참을 바라보다 심호흡을 하고 영암으로 떠나왔다. 발령문제로 몇 번은 청사를 드나들었건만 그때는 보이지 않던 수선화가 발령이 떨어지니 보이게 된 것이다.

난 영암으로 와 아내도 만났고, 내 집안도 돌보고, 교직 성장을 위한 도전도 해 나름대로 목표를 달성했다. 정호승 시인이 쓴 수선화처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었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었다. 그래 난 수선화를 다른 꽃과 같이 단순한 꽃으로만 대할 수가 없어, 꽃 이상으로 대하곤 한다.

똘이 집 앞에 피어나는 수선화는 45년 전과 달리 보름가량이 빠른 3월 15일 경부터 피기 시작해 지금은 한창 피어오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똘이는 집 주변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 아니면 그것을 내게 알릴 요량인지 꼭 시끄럽게 떠든다. 내가 알았다고 해서야 떠드는 것을 멈추곤 한다. 그런 똘이에게 난 신신당부했다.

“똘이야, 시끄럽게 하지마라. 수선화가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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