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인 덕진면 금강리 금산마을 전 목포고·구림공고 교수직수석 현 제주양씨대종회 회장 법선당 원장

우리의 유구한 7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것은 수많은 외부의 침략에서 이겨온 것이다.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로부터 우리의 민족과 영토를 지켜오는 것은 항시 우리 민중들의 힘이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나라를 지켜왔다. 특히 우리 전라도는 고대부터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최근까지도 일본은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다.

최근 전라남도는 김영록 도지사의 지시에 따라 의병들의 충혼을 기리고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호남의병 역사공원’을 조성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전라남도의 이 같은 구상은 임진왜란에서부터 3·1운동 이전까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의병이 외세의 침탈에 맞서 싸웠음에도 유적·사료 등의 조사·연구가 부족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왜구가 464년 전 을묘년에 영암일대를 삼켜버렸던 크나큰 시련을 생각하여 본다.

을묘왜란은 조선 정부가 일본의 무역선인 세견선(歲遣船)을 감축하자 대마도와 일본의 서부지방 왜구들이 1555년 5월11일 70여척의 배를 몰고 달량진, 지금의 해남 남창에 쳐들어 왔다. 왜구는 호각을 불며 불을 놓고 더러는 창을 휘두르며, 칼을 빼들고 덤비므로 완도의 가리포 수군첨사 이세린은 즉각 강진 병영의 병마절도사 원적(元績)에게 알리고, 자신은 성을 버리고 10리 밖 굴속에 숨어버렸다. 이세린은 군량미 100석을 싣고 도망하려다 이마저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대항하여 강진 병영의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韓蘊)이 나섰으나 전사하였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도 항복하였다. 왜구는 영암읍까지 쳐들어와 영암향교에 진을 치고 주둔하면서 온갖 만행과 노략질을 해댔다. 이에 어느 누구도 맞서 싸우지 못하여 우리 영암은 왜구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에 왜구를 물리치고 영암을 되찾기까지는 양달사 4형제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난 남암공 양달사는 해남현감 재임 중 모친상을 당하자 현감 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侍墓)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왜구에 의한 영암일대의 함락과 영암군수 이덕견의 투항소식을 전해듣고 대제학으로 있던 삼종제 송천공 양응정에게 자문을 구하니 “어버이와 임금은 일체인데, 어찌 예제(禮制)에 매여 국가의 난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양달사 형제는 의병을 일으켰다. 격문을 붙이고 의병을 모집하니 평소 양달사의 덕을 높이 사고 있던 영암사람들이 서로 의병을 자청했다.

남암공 양달사는 왜구를 현혹하기 위하여 꽃 모자와 알록달록한 옷을 입힌 패랭이와 광대들로 창우대(倡優隊=農樂隊)를 조직하여 왜구의 진(陣) 앞에서 온갖 희롱을 부리면서 일부 무장병사를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변복하여 창우대에 합류시켰다. 여기에 정신이 팔려있는 왜구를 역고개 넘어 매복해있던 병사와 의병이 일제히 공격하여 왜구를 혼란에 빠뜨렸다. 뛰어난 위장전술 전략으로 적들을 격퇴시켜 대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왜구의 난이 평정되자 양달사 의병장은 도포면 봉호정 집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계속하여 효의 표본이 되었다. 그러나 남암공은 10여 군데의 부상을 당한 후유증으로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공이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상중이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공을 낮추고 모든 공훈을 전라순찰사 이준경 등에게 돌린 진정한 의병장이자 영암의 민중 힘이 이루어 낸 나라사랑 애향심의 표상이다. 훗날 장흥부의 원벽(院壁)에 양달사의 공이 가장 큰데 조정의 공훈이 없음을 개탄하는 시가 나붙었다는 조선왕조실록 등을 근거로 영암을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널리 알려 국난극복의 사표로 삼아야 한다.

지금 영암은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암담한 위기이다. 지금이야말로 영암을 사랑하는 애향심이 지극한 후손이 필요한 시기이다. 영암사랑 애향심이 목숨보다 더 컷던 남암공 양달사 의병장의 애향정신과 시묘살이에서 나타난 효는 후손이 본받아 영암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교육자료가 될 것이다.

남암공 양달사 의병장의 영암사랑 정신을 꽃피워 우리 영암의 후손들이 영암을 다시 찾을 때 영암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다. 그 거룩한 뜻을 기리는 것은 결국은 과거보다 미래의 영암발전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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