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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의 지배 이념으로 기능했던 도선의 비보사상■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78>왕건의 집권에 이용된 도선의 풍수지리설
  • 글=박해현 박사(초당대 겸임교수)
  • 승인 2019.03.2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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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견훤의 사상체계였다

도선의 풍수지리학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태조 왕건과의 관계이다. 최유청이 찬한 도선비문에 “이후 신라의 정교(政敎)가 점차 쇠락하여 망할 조짐이 있었다. 대사는 장차 천명이 일어날 성인이 있을 줄 알고 송악군에 와서 놀았다. 때마침 우리 세조(왕건의 父)가 송악군에 집을 지어 살았다. 대사가 그 문 앞을 지나면서 ‘이곳에서 마땅히 왕자(王者)가 날 것인데, 처음 이 집을 지은 자가 이를 알지 못했구나’라고 하였다.(중략) 세조가 대사의 자문을 받아 집을 고쳐지었다. 대사가 2년 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으리라 하였다.”라 하여 태조 왕건의 출생과 고려왕조 건국을 도선이 예언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도선이 이인(異人)을 만났다는 부분과 더불어 신이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 그냥 믿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다만, 도선과 왕건의 관계가 매우 밀접함을 보여주는 근거로 삼기 위하여 상징 조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비문보다 훨씬 늦게 1317년 편찬된 민지의 ‘편년강목’에는 도선이 송악으로 17세가 된 왕건을 찾아가서 지리·천시(天時)의 법과 산천의 질서를 관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도선이 898년에 입적하였기 때문에 왕건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후대에 부회된 대표적 사례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왕건이 877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도선이 왕건을 만났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도선이 생전에 왕건 가문과 접촉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곡성 태안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던 동리산문의 후원세력은 견훤이었다. 특히 도선과 같은 영암 구림 출신으로, 스님의 직계 제자인 경보스님이 중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였을 때, 견훤의 도움으로 전주 남복선원에서 주석하였고, 다시 스승이 오랫동안 주석하였던 광양 옥룡사에  주지로 있게 되었다. 만약 도선이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다면, 경보가 견훤과 관계를 맺지 못하였을 것이다. 결국 도선의 풍수지리사상이 처음에는 견훤과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왕건은 호족세력의 통제수단으로 이용

어느 한 지방을 명당으로 생각하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국토관을 재편성한 풍수지리사상은 그 지역의 지방호족 세력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성격이 있었다. 말하자면 풍수지리설이 여러 갈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풍수지리설들은 전하지 않고 오직 왕건과 연결된 것만 전하는 것은 풍수지리설이 지닌 성격 때문이다. 어느 지역을 명당으로 하여 형성된 풍수지리설은 다른 지역을 명당으로 삼은 풍수지리설과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곧 풍수지리사상 각각은 공존할 수 없었다. 결국 풍수지리사상은 어느 하나에 의해 다른 것을 정리하게 되었다. 고려 초에 여러 지방에 전해진 각기 다른 풍수지리사상은 흡수 통합되어 송악 중심의 것으로 정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근간을 이룬 것이 도선의 풍수지리사상이었다. 견훤의 사상체계였을지도 모를 도선의 사상이 왜 왕건에게 봉사하는 풍수지리사상으로 정립되었을까? 바로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지닌 ‘비보(裨補)’ 사상에 해답이 있다 하겠다.

도선의 풍수지리 사상은 명당의 설정과 그곳을 중심으로 전국 산수의 순역형세를 집대성하였고, 그리고 다시 순역지세를 이용한 전 국토의 합리적인 운영원리로 ‘비보’를 내세웠다.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 ‘비보’를 왕건은 이용하였던 것이다. 기존 호족세력을 해체시키지 않은 채 이들의 항복을 받거나 도움을 받아 후삼국을 통일하였던 태조 왕건은 지배세력으로 편입된 호족세력을 통제할 방도를 심각하게 고민하였을 것이다. 곧 신라 말의 풍수지리설이 대체로 산천의 순역형세를 제시하는 것이지만, 지리쇠왕설에 의해 역지(逆地)로 떨어질 수도 있으며, 역지를 비보할 수도 있다는 도선의 비보 사상체계는 호족세력을 통제하면서 왕권을 집중해가려는 왕건의 의도에 절묘하게 부합되었던 것이다. 곧 현재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반역하면 순간 몰락할 수도 있고, 반대로 반역하였더라도 지극한 충성심을 발휘하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왕조의 중요한 정치 이데올로기

왕건이 훈요십조에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추점(推占)한 산수의 순역에 따라 개창하라.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정(占定)한 외에 망령되이 창건한 즉, 지덕을 손박(損薄)하게 되어 조업이 길지 못하다”고 했으니, 짐은 후세의 국왕·공후·후비·조신들이 각각 원당이라 칭하면서 더욱 창건한다면 크게 우려할 바라 생각한다. 신라의 말년에 경쟁하여 부도를 조성함으로써 지덕을 쇠약하게 하고 훼손시켜 망함에 이르렀음은 가히 경계하지 아니 하겠는가!“라 하여 도선이 정해 놓은 곳에만 사찰을 세울 것을 강조하였다. 곧 국토의 재편성 기준은 어디까지나 고려왕실의 의도에 부합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호족세력에 대한 통제를 의도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짐은 삼한 산천의 드러나지 않은 도움을 힘입어 대업을 성취하였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마땅히 사계절의 중월(仲月)에는 행차하여 백날이 넘도록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라 하여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서경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족세력 기반이 미약하였던 평양을 정치적 배후도시로 키우려 하였던 왕건은 풍수지리설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태조 왕건이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 밖은 산형(山形)과 지세가 모두 배역(背逆)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ㆍ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ㆍ국척(國戚)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변란하게 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의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리를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진(津)ㆍ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들이 권세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나 궁원(宮院)에 붙어 말을 간사하고 교묘하게 하여 권세를 부리고 정치를 어지럽혀서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그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벼슬자리에 두어 권세를 부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라 하여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차령이남 세력을 견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비보사상을 이용하여 특정지역을 중시하거나 어떤 인물을 중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풍수지리사상이 왕건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태조 왕건의 입장에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고려 왕조를 지탱하는 강력한 사상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왕건의 출생 단계부터 창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도선과 관련된 상징체계로 구축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다. 

왕건 이후에도 풍수지리사상을 정치 세력들이 이용하였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이자겸의 남경 길지설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삼국사기 편찬을 통해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며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던 인종 때에 고려왕실과 연결을 강조한 도선비문이 찬술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겠다. <계속>

글=박해현 박사(초당대 겸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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