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76>도선국사와 주몽의 탄생설화

최유청이 찬한 비문을 보면, 선승으로서 도선의 전기에 관한 부분, 풍수지리설을 습득하게 된 내용, 도선과 고려 태조와 왕건과의 관계 기사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기에 해당되는 부분은 스님의 탄생에 대해 세계(世系)와 부계(父系) 기록이 빠졌다고 하면서도, 모계를 중심으로 출생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모친 강씨의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나는 구슬을 한 개 주면서 삼키라 하였는데 삼킨 후 태기가 있었다. 만삭이 되도록 매운 것 비린내 나는 것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 이미 젖 먹을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아주 달랐고, 어릴 때 장난을 하든지 울 때에도 그 의향이 마치 불법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음이 있었다. 그의 부모가 반드시 유명한 승려가 될 줄 알고 마음속으로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도선의 부계는 알 수 없고, 그 모친 강씨가 꿈속에서 구슬 하나를 삼킨 후 도선을 낳았다는 위 얘기는 도선의 출생과 관련된 태몽이라고 처리될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여 설화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같은 도선의 출생과 관련된 얘기가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들에서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나주목 영암군 조), ‘신증동국여지승람’(영암군 최씨원) 등 조선 초기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해동역사’ ‘지봉유설’ 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역사서, 그리고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한 ‘일행선사전발록’ ‘고려국사도선전’ 등 여러 문헌에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나타난 도선의 출생관련 이야기는 최유청의 서술과는 차이가 있다.
 
도선탄생 설화의 원형은 조선시대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암군 고적 조에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인 최씨집 정원 가운데 길이가 한 장쯤 되는 오이가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최씨 딸이 그것을 먹었더니 임신이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아들을 낳았으나 부모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밖에 내다 버렸다. 그랬더니 비둘기(학, 독수리, 갈가마귀)들이 보호하여 기르고 있었다. 이를 본 최씨 부모들이 괴이하게 여겨 데려다 키우니 장성하여 승려가 되었다. 도선이라 이름 불렀다 한다. 도선은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에게 지리에 관한 법을 배우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말하자면, 도선의 출생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이 ‘오이를 먹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비둘기와 같은 새들이 키웠다’는 등, 최유청이 찬한 비문의 내용보다 설화적인 요소가 많음을 보여준다. 유교적 이념이 강조된 조선시대의 기록이 고려시대의 그것보다 오히려 전승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점에서 의아하게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설화적인 모티브가 강조된 출생 설화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설화의 모티브가 고구려 계통의 신화와 신화적으로 볼 때 유사성이 많다는 연구가 있다.

가령 “부여 하백의 딸 유화에게 햇빛이 비추더니 임신을 하였다. 그리고 닷되들이 만한 큰 알을  낳았다. 금와가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더니 다 먹지 아니하였고, 또 이를 길바닥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밟지 않고 피해갔다. 다시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아와 날개로 덮어 안았다. 왕이 그 알을 쪼개보려 하되 잘 깨어지지 않으므로 드디어 그 어미에게 도로 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는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는 주몽의 출생설화와 구조가 비슷하다.

도선 출생설화의 원형은 주몽의 탄생신화

도선설화와 주몽신화는 약간의 소재의 차이만 있을 뿐, 큰 틀에서의 구조가 동일함을 볼 수 있다. 두 신화 모두 모친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게 된다. 임신한 계기 역시 ‘해’나 ‘오이’로 남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주몽과 도선은 태어나자 마자 모두 버려지지만, 새와 짐승들이 보호해주어 살아남게 된다. 이렇게 신기하게 태어난 주몽은 건국 영웅이 되고, 도선은 불교 영웅이 되고 있다. 이처럼 두 영웅들이 비슷한 설화 구조를 갖게 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주몽 탄생신화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고 기록에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주몽의 탄생신화와 도선의 출생설화 모티브가 비슷한 것은 후대 어느 시기에 이르러 도선을 주몽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생기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국초부터 태봉이라는 국호를 고려로 바꾸는 등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시대에 따라 나타나곤 하였다. 무신 정권기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편찬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김부식이 찬술한 삼국사기가 교과서에도 나와 있듯이 신라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통설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필자는, 고구려 건국과 관련된 신화적 사실을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상세히 다루고 있는 것을 볼 때, 김부식이 단순히 신라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인 해석이라 생각한다. 김부식은 유교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면서도 고려건국의 모델이 되었던 고구려 역사의 신비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고려역사의 상징성을 부각하려 했었던 것이다.

결국 도선의 탄생설화가 주몽의 탄생신화가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인식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도선의 출생과 관련된 모티브가 주몽과 비슷하다는 것은 도선의 출생설화가 형성된 시기가 적어도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조되었던 고려시대로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도선과 관련된 출생설화의 원형은 아무래도 최유청이 찬한 비문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의 문헌에 남아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최유청이 비문을 작성할 때 주몽신화와 유사한 도선 탄생설화가 전승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 부분은 생략한 채 선승으로서 풍수지리 및 태조 왕건과의 관계만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도선의 비문이 찬술되기 직전에 완성된 삼국사기에서 주몽의 출생신화가 자세히 다루어졌기 때문에 그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 도선 설화를 가지고 비문을 지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유청은 도선의 탄생설화를 보다 현실적인 표현으로 바꾼 대신에 풍수지리를 끌어들여 도선과 태조 왕건과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려 하였던 것이다. 유교적 통치질서를 강조함으로써 요동치는 고려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완성되고 있던 인종 말에 도선의 비문 찬술작업이 추진되었다는 것은 도선을 통해 고려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삼국사기나 도선비문 편찬이 모두 통치체제 재정비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설화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본래 편찬의 목적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최유청은 이 점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라 하겠다.
 
도선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고려 지배세력

한편 마한의 옛 땅이며, 백제의 옛 땅 출신인 도선스님을 주몽의 탄생신화와 연결 지으려 하였을까? 신라 천년역사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과정에서 풍수지리 이론을 빌어 왕건의 집권을 합리화 시켜준 스님의 공은 무엇보다 크다. 설사 그 역할이 실제는 미약하였다고 하더라도 풍수지리 사상을 집권에 이용하였던 고려의 입장에서 도선스님을 상징적으로 우대하려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왕건의 고려와 대립하고 있던 견훤의 후백제 지역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갖는 상징성이 더욱 컸다.

따라서 국초부터 고려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도선스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신화적 구성요인을 지닌 스님의 탄생설화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것도 고구려 건국의 아버지인 주몽의 탄생신화와 연결시킴으로써 고구려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이중효과까지 노렸다고 본다. 스님이 고려건국 이전에 이미 입적하였기에 그의 탄생과정 등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기가 보다 용이하였다고 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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