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75>최유청의 ‘백계산옥룡사승선각국사비명’ 찬술 배경

도선스님 연구의 대표적 사료

광양군 옥룡면 추산리에 ‘도선국사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농촌체험과 도선국사 유적체험 등을 즐길 수 있는 마을이다. 도선국사의 유적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되는 체험 프로그램은, 마을입구 정자에서 시작해 마을 일배미, 옥녀배혈을 거쳐 옥룡사지와 동백림을 돌아본 뒤 마을입구로 돌아오는 코스로 진행된다. 영암출신 인물이 다른 지역인 광양에서 이처럼 추앙받는 사례는 이례적이다. 

도선국사에 대한 호칭도 ‘국사(國師)’ ‘성승(聖僧)’ ‘선승(禪僧)’ ‘도승(道僧)’ ‘신승(神僧)’ ‘풍수도참승‘ ’술승(術僧)’ ‘권승(權僧)’ ‘간승(奸僧)’ 등 극과 극이다. 심지어 실존인물이 아니라 지배 권력에 의해 가공된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이렇듯 스님을 보는 시각이 일정치 않다. 따라서 ‘도선’이라는 인물에 접근하는 것을 무척 조심스러워 한다. 더구나 도선국사가 남긴 직접적인 사료는 없고, 그를 알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료라고 하는 ‘백계산옥룡사승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僧先覺國師碑銘)’이 스님이 입적한 후, 250년이나 지난 1150년에야 찬술되었다는 한계도 있어 연구하는데 어려움도 많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선스님은 고려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현종 대에 대선사, 숙종 대에 왕사, 그리고 인종 때 선각국사로 추증된 인물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오히려 승직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 시대마다 스님을 필요로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말하자면 스님을 이해할 때 반드시 그 당시의 정치적인 관점도 함께 고려해야 함을 시사해준다. 따라서 도선 스님을 살펴보는 것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시대를 관통하는 사상사 및 정치사의 흐름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사료적 가치가 높은 역사서

많은 연구자들이 스님을 연구하는데 자료 부족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즉 스님 사후 250여 년이 지나 작성된 비문을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연구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비문이 현재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 1차 사료라고 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역시 신라가 멸망(935)하고 200여년이 지난 1145년과 300여년이 지난 1281년에 각각 편찬되어 엄밀히 1차 사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2차 사료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다. 따라서 비록 스님이 입적한 지 250여년이 지나 찬술되었다 하여 사료적 가치를 의심하며, 설화와 관련된 해석에 치우쳐 스님의 행적을 살피려는 일부 연구태도는 온당치 않다. 설사 설화적인 요소가 있다 하여도 설화가 전달하려 하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찬술작업 동시 추진

이 비명은 고려 의종 4년 문신 최유청이 왕명으로 찬술하였다. 비명 머리말에 “생각하건대 선각국사의 높은 도덕이 장하여 국가에 공업이 가장 깊으므로, 우리 선왕(인종)께서 여러 번 봉증(封贈)을 더하여 극도로 존숭하였으나, 그 행적을 지금까지 문장으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짐(朕)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인고(父王인 인종)께서 벌써 너에게 비명을 지으라는 명령이 계셨으니 공경히 할 지어다”라고 하여 국왕인 의종의 명으로 비명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실질적인 논의는 이미 인종 때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인종 때는 1126년 이자겸의 난, 1135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때였다. 당시 인종은 외척 이자겸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여러 조치들을 취하였다. 서경 세력을 끌어들여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고, 다시 김부식 등 개경파를 이용하여 묘청 등의 서경파를 견제하려는 과정에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인종 때는 고려 역사상 정치사적으로 가장 혼돈과 격랑의 시기였던 셈이다.

이 무렵인 1145년, 인종의 명으로 찬술된 것이 유명한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가 유교적 관점에서 서술되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익히 알고 있다. 말하자면 삼국사기 편찬은 어수선한 정치 질서를 유교의식의 고양을 통해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던 것이다. 1281년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전통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아 놓은 ‘유사(遺事)’로, 삼국사기가 유교적 관점에서 생략한 여러 전승기록들을 담았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가 있다.

특히 삼국유사는 단군 건국신화가 최초로 수록되어 있는데, 단군을 하늘의 손자로 연결을 지음으로써 독자적인 역사의식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고 있다. 우리의 전통 계승을 강조하며 독자적인 역사의식을 주창하는 ‘삼국유사’가 나오게 된 데는, 고려가 원 간섭을 받으며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서를 포함하여 모든 기록이나 상징들은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이나 사물을 분석할 때, 그 시대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려사회의 안정을 희구했다

도선국사 비명 편찬 논의가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이 이루어지던 인종 말엽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인종 말 편찬된 삼국사기에 이어 의종 초에 도선비명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곧 인종이나 의종 모두 유교와 불교를 통해 정치적 격동기에 휩싸인 고려사회를 헤쳐 나가려는 의도가 있었지 않나 한다. 최유청이 찬한 ‘백계산옥룡사승선각국사비명’이 나오게 된 배경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비명 내용을 살필 때,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스님은 통일신라 말 전남 곡성을 중심으로 ‘동리산문’이라는 선종 종파를 형성하였던 혜철 스님의 제자로 선승(禪僧)으로도 유명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교과서에서 학습한대로 ‘풍수지리학의 대가’라는 사실이 보다 익숙하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의 정치적 입지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해준 ‘송악길지설’을 주창한 인물로 더 알려져 있다. 수많은 사찰들이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터를 잡았고, 오늘날에도 묘(墓)를 쓸 때 이를 바탕으로 하는 등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나온 스님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은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영암군에서도 일찍이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묶어 편찬한 ‘선각국사도선의 신연구(1988)’라는 책도 크게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선승으로서의 스님의 위치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스님의 출계에 대한 “국사의 휘(諱)는 도선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사람이다. 그 선대와 부조(父祖)는 역사에서 기록이 빠졌다. 혹은 태종대왕의 서손이라고 한다”는 설명을 토대로 태종 무열왕과 연결지어 진골 귀족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할 경우 영암출신이라고 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진골이라고 한다면, 영암지역으로 중앙정부에서 왕족이 이주했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출계 문제를 차분히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또한 898년 옥룡사에서 열반하였다고 나와 있는데, 당시 옥룡사가 있는 광양지역은 후백제 견훤의 세력권이었다. 따라서 도선스님이 왕건과 정치적으로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논란도 있다. 특히 비문 앞부분에 있는 출생과 관련된 설화적인 내용에 초점이 모아지다 보니 비명을 통해 알 수 있는 다른 많은 사실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최유청이 쓴 비명이 적힌 비석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비명의 내용만 조선 성종 때 문신 서거정이 펴낸 ‘동문선’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이 비명은 내용에 따라 ①도선비문의 찬술 이유 ②선승으로서의 도선의 일대기(도선의 탄생과 입적) ③도선이 풍수지리설을 터득하게 된 내력 ④도선이 왕건 탄생을 예언하고 고려 창업에 조력한 이야기 ⑤찬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를 차분히 검토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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