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73>마한남부 연맹, 백제와 통합인가 병합인가

진정한 마한사 연구에 역량 모아야

마한사의 중요성을 여기저기서 강조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2018년 광주시교육청에서 발행한 역사 교과서에 마한사가 완전히 누락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2018년 전라도 정명 천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전라도 천년사’의 목차를 봐도 마한의 상징이자 영암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왕인박사 항목은 보이지 않고, 부안의 죽막동 제사유적은 있지만 남해신사 얘기는 없다. 영산강유역의 마한도 ‘옹관묘’ ‘고총고분 사회’등으로 편목되었을 뿐, 독자적 정치체를 설정하고 있지 않다. 답답할 따름이다. 

성왕 때 마한남부 연맹을 통합하며 재편한 행정구역에 일정한 특성이 보인다. 월나군(영암),  발라군(나주), 도무군(강진), 복홀군(보성)·파부리군(보성복내) 등 원래 세력이 강하였던 곳에 ‘군(郡)’ 규모의 행정구역이 설치되고 있다. 3세기 후반에 모습을 보였던 마한 왕국들이 위치했던 곳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를 통해 마한 연맹체들이 지역 내에서 세력 교체는 있을지언정 광역의 정치적 통합은 쉽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있는 바와 같이 마한남부 연맹국가들은 세력이 비슷하기 때문에 분립적인 경향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마한남부 연맹, 공고한 힘 갖고 있어

그러나 외부문화가 폭넓게 유입된 영산지중해 정치체들을 중심으로 큰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영암 시종, 나주 반남과 복암리 일대에 밀집 분포되어 있는 무수히 많은 거대 고분들은 당시 마한 연맹체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들이 각기 독립성을 띠었지만, 영산강식 토기와 같은 공통된 문화특질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마한남부 연맹체가 공고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고구려에 밀리고 있던 백제가 무력으로 이 지역을 병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성왕 때 마한과 통합이 시급하였던 백제의 입장에서는 대등한 수준의 통합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가 주장한 ‘성왕 대’에 마한과 백제가 통합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임영진 교수 등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대등한 수준’의 1대1 통합이라는 필자의 주장은 백제에 의한 ‘무력 정복’ 내지는 ‘강제 병합’이라는 기존의 견해와 전혀 다르다. 마한남부 연맹은 백제와 통합된 것일까? 병합된 것일까? 기존 논의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백제와 마한의 통합과 관련된 주장들은 4세기 후반에 마한을 무력으로 백제가 병합하였다는 이병도의 통설부터 시작하여, 4세기 후반에 병합되었던 마한이 5세기에 들어 자치권을 얻었지만 5세기말 동성왕 대에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설, 그리고 영산강 내해 일부만 6세기 중엽까지 독자세력을 유지하였다는 설 등 다양하다.

5세기 말에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였다는 주장은 근초고왕 대 백제의 수중에 들어간 전남지역의 마한세력이 5세기 중엽에 들어서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전남 동부지역은 가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고, 서남해 지역은 대가야 및 왜와의 관계를 맺으며 자치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5세기 말 동성왕 대에 이르러 백제의 힘이 다시 커지면서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백제는 전남 서남해와 내륙지역에 있는 토착세력들에게 왕후를 봉작하였는데,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이 그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백제의 직접 지배에 들어간 서남해 세력이 저항하자, 동성왕이 무진주를 친정하여 직접 지배를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마한의 고유 문화특질, 독자적 정치체 입증

이 주장은 전남지역에 있던 마한이 4세기 말 백제의 직접 지배에 들어갔다가 5세기에 가야나 왜의 도움을 받아 자치권을 얻어냈다는 논리로, 이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독자적 마한 연맹체의 실체를 파악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서도 6세기 중엽까지 마한세력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백제에 완전 복속된 마한세력이 토착적 문화전통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말하자면 6세기 중반까지도 보이는 많은 독자적 문화의 특징들이 형성된 배경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도 백제식이 아닌 가야나 왜 계통의 영향이 많이 보이고 있다. 곧 여러 문화가 융합된 고유의 문화 특질이지 백제가 마한을 복속시킨 증거물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키워온 세력들이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며 발전시킨 특징들인 것이다.

한편, 영산강 내해의 마한세력이 6세기 중반까지 백제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한강유역의 백제에 밀려 남하한 마지막 마한세력이 전북 서남부에서 전남서부로 연결되는 서해안권,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내해권, 고흥반도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 등으로 커다란 권역을 이루며 6세기 초까지 단절 없는 발전을 지속하며 백제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언뜻 전남지역이 6세기 중엽까지 백제로부터 독립된 위치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영산강 내해로 마한 세력이 축소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이 주장은 남해안권의 마한이 백제와 왜의 교류에 협조하지 않자, 백제가 먼저 이 세력을 정복하였다는 것이다. 백제가 그 세력을 ‘언제’ 정복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백제가 남해안을 정복하자, 서해안 일대의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 등이 놀라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추가 설명에서 대략을 짐작할 따름이다. 일본서기 신공기에 근초고왕이 침미다례를 공격하자 비리, 벽중 등이 놀라서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가 남해안권 및 서해안 일대까지를 정복한 시기가 4세기 후반이라고 파악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결국, 6세기 초까지 단절 없이 세력을 유지한 세력은 전남 전역의 마한이 아니라 영산강 내해의 마한 세력뿐이고, 나머지 지역은 4세기 말 이미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논리인 것이다. 더욱이 영산강 내해의 왜소한 마한세력으로 축소된 마한 세력이 1세기 이상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왜의 큐슈 세력과 제휴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여 왜의 영향력을 강조하고 있다. 529년 큐슈 세력이 야마토 정권에 흡수되는 정치 변동으로 영산강 내해의 세력이 더 이상 큐슈 세력과 연대가 불가능해지자 자구책으로 백제에 투항하였다는 주장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만약 영산강 내해 세력만이 백제에 포위된 채 존속되고 있었다면 시종, 반남, 복암리 등에 밀집 분포되어 있는 대형 고분들을 축조한 정치 세력들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영암 시종 옥야리의 원형과 방사상 형태가 조화된 방대형 고분은, 이 지역이 여러 문물이 교류되는 중요한 거점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이다. 이 밖의 많은 유물들도 이들 지역이 백제보다는 왜나 가야 심지어 신라와 교류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들 지역이 백제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알 수 있겠다.
 
마한남부 연맹의 출토유물과 문헌기록

영산지중해 세력이 큐슈 지역과 연대를 하다 큐슈세력의 붕괴로 백제에게 흡수되었다는 것은 왜의 도움으로 마한세력이 유지되었다는 논리와 다름없다. 이러할 때 영산강식 토기와 같은 무수히 많은 이 지역의 독자적 특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세력이 약화된 마한세력이 자구책으로 백제에 일방적인 통합을 강요당하였다면, 성왕이 마한세력을 통합하며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어가며 부여족 계승의식을 강조하려 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무왕이 왜 마한계와 손을 잡으려 했는지, 신라가 백제를 다시들 지역 세력을 지칭한 ‘응류’라고 불렀던 까닭도 설명할 수 없다. 성왕 때 편성된 37군 가운데 무려 15군을 전남지역에 배치한 이유도 설명이 어렵게 된다. 

결국 이제까지 나온 주장들이 겉으로는 이병도의 통설을 비판하면서 영산강유역에 마한의 독자적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고 이야기 한 것처럼 보이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병도의 틀에서 벗어나 있지 않음을 곧 알 수 있다. 마한남부 연맹 중심의 마한사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구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의 접근이 중요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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