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병장 양달사 <6>
조정에서는 영암전투에 참여한 지휘관들의 상벌(賞罰) 논의

■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가고

을묘왜변 당시 전공과 관련하여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전라도 장흥부(長興府)의 원벽(院壁)에 세태를 풍자하는 시(詩)를 써 붙였는데, 양달사 장군에 대한 기록이 언급돼 눈길을 끈다.

장흥 사람들은 부모의 상사를 당한 듯하니
한공의 정치하는 방책이 어짊을 알겠네
구원하지 않았으니 광주 목사의 살점을 씹고 싶고
곧 바로 도망간 수사의 몸뚱이는 찢어야 마땅하네
성을 버린 홍언성은 먼저 참형해야 하며
진을 비운 최인도 그 죄가 똑 같네
원수는 금성에서 부질없이 물러나 움추렸고
절도사는 중도에서 일부러 머뭇거렸네          
감사는 어찌하여 계책을 도모하는데 어두웠으며
방어사는 어찌하여 사람 죽이기를 즐겁게 여겼는가
품계가 올라간 이윤은 진정한 장수이지만
자급을 뛰어넘은 변협은 바로 간사한 신하이네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가고 
의리 없는 유충정이 강진에 부임했네
평소 국록을 먹을 때에 모두 거짓을 꾸몄는데
오늘날 위태함을 당하여 문득 실상이 드러나네
멋대로 날뛰는 왜적을 누가 대적할 수 있으랴
공사 간에 모두 불태워 없앴으니 생민들이 곤궁하네
상벌은 법이 없어 공도가 무너졌으니
실망하여 탄식하는 임금의 수치는 씻을 길 없네
행객이 다만 들은 대로
벽에다 써 붙여서 지나가는 사람을
흥기시키려 하네

위 시의 내용 가운데 한공(韓公)은 한온(韓蘊), 광목(光牧)은 이희손(李希孫)을 지칭한 것이다. 수사(水使)는 김빈(金贇), 원수(元帥)는 김준경(金浚慶), 절도사(節度使)는 조안국(趙安國), 감사(監司)는 김주(金澍), 방어사(防禦使)는 남치근(南致勤), 이윤(李尹)은 전주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을 지칭하는 은어이다. 당시 변협(邊協)은 해남을 보전했기에 장흥부사에 초수(超授)되었으나 그의 공이 아니었으며, 양달사는 영암을 지킨 공이 있었지만 발탁되지 않았으며, 유충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어 의리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익명의 시를 통해서도 양달사의 공이 묻히고 좌도방어사 남치근과 전라순찰사 이준경 등 관군에게 돌아갔던 안타까운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 우도방어사 김경석의 장계

한편 조정에서는 왜구가 영암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고 사기가 꺾이어 퇴각함으로써 을묘왜란이 평정되자 김경석의 장계를 시작으로 사간원, 사헌부, 비변사 등을 중심으로 영암전투에 참여한 지휘관들을 비롯하여 군사들의 상벌(賞罰)을 논하였다.

먼저 우도방어사 김경석의 장계 내용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라 우도방어사 김경석이 군관 남정(南丁: 젊은 남자)을 보내 장계(狀啓)를 올리니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하다.(명종 10년 5월 30일) 

임금이 남정을 앞으로 다가오도록 하여 이르기를, “서로 싸울 때의 일과 보고들은 일을 자세하게 말하라.”하니, 남정이 아뢰기를, “당초에 왜적들이 영암에 와서 향교를 차지하고 있을 적에 적장인자는 성전(聖殿)의 위판(位版)을 모시는 교의(交倚)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있고 누른 빛깔의 기(旗)를 든 선봉인자가 그 기를 높였다 낮췄다 하여 마치 우리 군사를 부르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였고, 또 칼과 창을 휘두르고 박수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습니다.

여염(閭閻: 보통사람의 살림집)의 사람들이 모두 성 안에 모여 들어서 처음에는 순찰사와 방어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믿으며 안정되어 있다가 왜적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는 기가 꺾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장(主將)이 군관을 시켜 통유(洞諭)하여 동요되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군중에 전령하기를 ‘나아가 싸우는 사람은 살고 물러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 너희들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가,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한결같게 가져야 한다. 물러서다 죽는 것이 어찌 나아가 싸워 살게 되는 것만 하겠는가’하니, 한참 만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었습니다.

그 이튿날 왜적들이 모두 동문 밖에 모여 칼을 빼들고 날뛰며 위세를 보이므로 주장이 용맹스럽고 건장한 활 잘 쏘는 사람 15명을 뽑아 적들의 기세를 살펴보며 접전하게 하려하니 왜적들이 되돌아서서 서로 희롱하는 짓을 하며 두려워하지 않은 모양을 보였습니다.

우리 군사가 장전(長箭: 싸움에 쓰는 긴 화살)을 쏘자 칼로 받아쳐 맞추지 못하게 하다가 편전(片箭: 총통에 넣어서 쏘는 하나로 된 화전)을 쏘자 왜인들이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왜인들이 1위(衛) 1천여 명을 나누어 나주의 통로를 가로막고 우리 구원병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안국이 영산진에서 변을 듣고서 오다가 왜적들의 침범을 받아 통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전주의 효용군(驍勇軍: 날쌔고 용감한 군인) 6명과 함께 향교를 살펴보니, 왜장이 위판 모시는 교의(交倚)에 걸터앉아 있기에 신이 편전을 쏘자 화살이 그가 앉아 있던 옆의 기둥에 맞았는데 우리 군사가 일시에 쏘아 그의 왼쪽다리를 맞추자 왜장이 칼로 자기 휘하들을 치므로 칼에 맞은 사람들이 모두 다쳤습니다. 주장이 화전을 쏘도록 했었는데 마침 서풍이 크게 일어 화전이 빠르게 나가므로 승세를 타고 쫓아가니 왜적들이 모두 향교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비 오듯 하자 적들이 드디어 기세를 잃고 무너져 도망하므로 적의 머리 1백 4급을 베고 또 패하여 도망하는 적을 쫓아가 6급을 베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신이 나올 때에 좌도 방어사 남치근과 병사 조안국은 도망하는 적을 추적하려고 작천에 진을 쳤는데, 작천은 병영·강진·영암이 서로 만나는 곳입니다. 주장(主將)은 추격하려 하다가 왜적들이 이 틈을 타고 성으로 들어올까 싶으므로 감히 추격하지 못했습니다.”<계속>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