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병장 양달사 <5>
왜적과의 싸움을 피했던 관군의 비굴한 행태 비방 글 나붙기도

선대 때 나주서 도포 봉호정에 정착

의병장 양달사에 대한 기록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1518년(조선 중종 13년) 도포면 봉호정에서 출생했고 자는 도원(道源), 호는 남암(南巖)으로 제주가 본관이다. 고조 때 금성(나주)에서 도포면 봉호정으로 세거(世居)했다. 증조는 감역(監役)공 흥효(興孝), 조부는 생원 필(泌)이다. 부친은 사복시주부(司僕寺注簿, 주부: 조선시대 종 6품의 벼슬) 승조(承祖)이며, 그의 어머니는 청주 한씨다.

양달사는 어려서부터 담력과 용감한 기질이 있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어 큰형 달수, 아우 달해, 달초와 함께 삼종숙(三從叔)이 학포(學圃)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다.

그리고 1536년(조선 중종 31년) 무과(武科)에 급제했고, 1544년(중종 39년) 중시(重試: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다시 보는 시험으로 이 시험에 급제한 사람은 당상 정삼품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에 합격하여 성환 성(城)의 찰방과 전라도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의 우후(虞候)와 진해 현감을 역임했다.

양달사가 해남 현감으로 재직 중에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시묘(侍墓,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무덤 옆에 막을 짓고 사는 일)를 하고 있던 중 을묘년(1555년)에 왜구가 달량진에 쳐들어와 난(亂)을 일으켜 달량진이 함락되었다.

이어서 강진·완도·진도·장흥·병영 등이 함락되고, 강진의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 현감 한온 등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왜구에 항복하고, 영암읍까지 쳐들어와 향교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제학(副提學)으로 있던 4종제인 양서정(梁庶鼎)에게 사람을 보내 수습책에 대한 답서를 받고 행동에 나섰다.

의병장 양달사는 동생인 달수와 여럿이 영암읍성으로 들어가 의병을 모집하고, “허를 찌르고 기병을 내지 않으면 승전할 수가 없다”면서 광대와 패랭이들로 창우대(倡優隊=농악대)를 조직하여 영암향교에 주둔하고 있는 적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온갖 굿을 하도록 했다.

이를 보고 있던 왜구가 넋이 나간 틈을 이용하여 향교 북쪽 언덕 뒤에 매복하고 있던 의병들이 일시에 공격하고, 동시에 창우대 틈에 섞어놓은 무장병들이 동시에 공격했다.

또 성안에 있던 민중들이 징과 북을 치며 의병들의 뒤를 따라 적을 공격했다. 결국 왜구의 기를 꺾자 그때서야 관군이 합세하여 110여 명의 왜적을 살해하여 국가적인 왜란을 평정하게 되었다. 비로소 양달사 의병장은 고향인 도포면 봉호정으로 돌아가 시묘살이를 다시 시작하면서 예제(禮制)를 예전처럼 올렸다.

공은 관군에게…영암주민들 비분강개

조정에서는 영암전투가 끝나고 평정을 되찾자 영암전투의 공과(功過)를 논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과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현지 사정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양달사 의병장의 공이 좌도방어사 남치근과 전라순찰사 이준경에게 돌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이에 장흥부(長興府)의 원벽에는 당시의 전황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양달사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관군이 왜적과의 접전을 피하는 비굴한 행태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붙였다. 

이에 양달사는 “상 중에 나서서 군무에 종사한 것이 임금의 명으로 한 것이 아닌데 공을 자랑하며 상을 구함은 내가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겸양을 갖추었다. 그 뒤에 양달사는 전시에 입은 상처가 독이 되어 1년 만에 세상을 떴다. 그때 나이 겨우 41세였다.

양달사가 세상을 뜨자 영암 군민들은 눈물을 흘리고 길 가는 사람들도 탄식하며 “그 때에 양달사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어육이 되었을 것이다.”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왜구 침입이 있은 이래로 을묘년(乙卯年) 호남의 승첩 같은 일이 없었는데 “만약 공이 몸을 내던져 육박전을 벌여 먼저 그 예기를 꺾지 않았다면 아무리 원수와 방어사의 군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전승의 공을 한 쪽의 반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영암군민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양달사 의병장의 출정시(出征詩)

타일러 달려온 의병을 모집하니 장정
4천명이 규합되었다
강 머리에는 깃발의 빛만 보이고 성위에는
화살의 나르는 소리만 들린다
구렁에 쓰러져 죽은들 누가 한하랴
길 위에 이리 떼들 내 마음 놀라진다
영암루 아래에 맑은 강물이 길게 슬픔을
띄고 밤새껏 운다.

200여년 지난 뒤 좌승지에 추증

을묘년의 승첩을 세상에서는 모두 남치근(좌도방어사)과 이준경(전라순찰사)의 공이라고 칭하고 양달사의 공은 거기에 들지 못하니 그것은 공이 겸손하여 공을 세움에 자처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자손이 미약해지고 세대가 점점 멀어져 그런 사적(史蹟) 마저도 묻혀져 가기 때문이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이하 생략)

전술한 글은 1777년(정조 1년) 거창후인 신사준(愼師浚)이 기록하고, 나주목사 임육(任育)이 행장을 썼다. 그 후 200여년이 지난 헌종(憲宗) 때 좌승지(左承旨:조선시대 왕명출납을 맡아 승정원에서 근무했던 정3품의 벼슬)를 증(贈)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의병장 양달사는 영암전투 중 주야 3일간의 격전 끝에 적에게 포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군량미가 떨어지고 음료수가 고갈되어 큰 혼란과 굶주림과 갈증을 겪게 되었다. 군사들의 동태를 살피던 양달사는 영암성 안에서 장독(일명 軍令旗로 군인들의 기 중 장군 표지기)을 높이 들고 한 번 호령한 후 땅을 내려찍자 신기하게도 꽝하는 소리와 함께 군령기를 찍었던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이때 너무나 뜻밖의 광경을 바라보던 군사들은 함성을 올리며 솟아오른 물로 갈증을 달래고 사기가 충천하여 수많은 왜구를 섬멸하였다는 일화가 영암에 전해지고 있다. 바로 이 샘을 ‘장독골 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이 샘은 영암읍내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낙들의 빨래터로 쓰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장독골 샘은 점차 기능을 잃으면서 매몰되었다가 샘 옆에 김기회(金基會) 영암군수가 비문을 지어 1971년 3월 공적비(功績碑)를 세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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