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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부모는 한 몸인데 어찌 예제에 얽히어 소홀하게 할 것인가”■ 의병장 양달사 <4>
모친상 당하자 해남 현감 직 사임하고, 시묘살이 하다 전투에 나서
  • 글=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승인 2019.01.2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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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달사의 묘 도포면 봉호정(鳳湖亭)에서 태어난 양달사는 해남 현감 재임 중 모친상을 당하자 현감 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侍墓) 살이를 하던 중 왜구가 침입하자 의병을 자청, 영암성에 들어가 왜구를 물리쳤다. 양달사 의병장은 이 때 10여 군데의 부상을 당한 후유증으로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시종면 조동에 모셔져 있는 양달사 의병장의 묘지.

영암전투와 양달사 의병장 

을묘왜변(달량진 왜변)으로 인해 장흥 강진 병영 진도 완도 등이 많은 피해를 당했으며, 향교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북상한 왜구는 영암읍까지 쳐들어와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왜구는 영암향교에 진을 치고 주둔하면서 위판(位版, 공자 등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단)을 불태우고 약탈한 재물을 소와 말위에 나뉘어 싣고 거리낌 없이 영암향교로 들어가 위판과 제기를 망가뜨리고, 때때로 촌락에 나와 노략질을 해댔다.

그러나 우도방어사 김경석(정3품, 소장급)은 겁내고 두려워하여 감히 나가서 싸울 계책을 하지 못하고 단지 성으로 들어와 자신을 보존하고만 있었다.

당초에 전주부윤 이윤경이 우도방어사 김경석에게 영암에 진을 치고 머무르면서 나가 싸우기를 청했으나 김경석이 듣지 않았다. 군교들이 만일 패하게 되면 혼자 죄를 받아야 한다고까지 재삼 간청하자, 김경석은 할 수없이 나가 싸우라고 허락하기만 하고 자신은 성안에 남아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 나서지 않았다.

장사(壯士)들이 전주부윤 이윤경의 지시를 받고 분개하고 원망하면서도, 3일간 결전하여 왜구 1백여 명의 머리를 베자 남은 적들이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나주의 촌락으로 약탈을 갔던 일부의 왜구들이 영암향교에 와보니 그의 무리들이 이미 흩어져 없어진 사실을 알고 뒤늦게 정신없이 도망갔다. 이에 이윤경이 군사를 내어 끝까지 추격하기를 청하였으나 우도방어사 김경석이 듣지 않다가 간청해서야 겨우 6명의 머리만 베게 되었다.

이처럼 왜구를 물리치고 영암성(靈巖城)을 수복하는 데에는 양달사와 양달수 형제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창우대를 조직, 왜구에 맞서다

도포면 봉호정(鳳湖亭)에서 태어난 양달사는 해남현감 재임 중 모친상을 당하자 현감 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侍墓) 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왜구에 의한 달량진 등의 함락과 영암군수 이덕견의 투항소식을 전해 듣고 “어버이와 임금은 일체인데 어찌 예제(禮制)에 매여 국가의 난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라며 의병을 자청했다. 양달사가 옷에 먹물을 들여 입고 영암성으로 들어가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모집하니 평소 양달사의 덕을 높이 사고 있던 영암사람들이 서로 의병을 자청했다.

양달사는 왜구를 현혹하기 위하여 꽃 모자와 알록달록한 옷을 입힌 패랭이와 광대들로 창우대(倡優隊=農樂隊)를 조직하여 왜구의 진(陣) 앞에서 온갖 희롱을 부리면서 일부 무장(武裝) 병을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변복하여 창우대에 합류시켰다. 여기에 정신이 팔려있는 왜구를 역고개 넘어 매복해 있던 병사와 의병이 일제히 공격하여 왜구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어 앞쪽에서 광대들도 협공하였고, 성안의 노소 백성들도 징 등을 두드리며 왜구의 뒤를 추적하였다.

양달사 의병장은 병사를 모아 잠시 쉬도록 하였는데 왜적들이 병을 모아 다시 추격해오니 한편 싸우며 한편으로는 퇴각하던 중 말의 발이 진흙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양달사 의병장이 손으로 말의 갈기와 꼬리를 잡아 끌어내어 다시 오르려는데 왜장이 칼을 던지며 공격해와 말이 이를 맞고 거꾸러지고 말았다. 양달사는 급히 성에 들어가 만호(萬戶) 박천추(朴天樞)의 말을 빌려 타고 적을 유인했다.

양달사 의병장이 패한 척하고 도망치다 금교의 진흙 밭에 이르러 말을 옆구리에 끼고 번개처럼 지나니 적들은 뒤쫓아 오다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양달사 의병장은 말을 돌려 칼로 모두 쳐 죽였다. 이윽고 관군의 군사들도 합류해 함께 적들을 격퇴시켰다. 이때 왜구 110여명을 죽이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왜구의 난이 평정되자 양달사 의병장은 도포면 봉호정 집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하며 예제(禮制)를 지켰다. 그러나 양달사 의병장은 10여 군데의 부상을 당한 후유증으로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喪) 중에 의병 자청 대승 거둬 

조선 정조 때 편간(編刊)된 것으로 현재 16종의 판본이 전하고 있는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따르면 양달사(梁達泗)의 자는 도원(道源), 본관은 제주이다. 감역(監役) 흥효(興孝)의 증손이며, 사복주부(伺僕主簿) 승조(承祖)의 아들이다. 중종 31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중종 39년(1544)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효제(孝悌)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는 청간(淸澗)으로 임하였다. 명종10년(1555)에 해남 현감이었는데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 때 왜구들이 쳐들어와 병마사인 원적과 장흥 현감 한온이 전사하였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항복하였다.

원수 이준경과 방어사 남치근이 적의 예봉을 막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이에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임금과 부모는 한 몸인데 어찌 예제에 얽히어 소홀하게 할 것인가”라며 상복을 입은 채 영암의 빈 성에 들어가니 평소 공의 뛰어난 지략에 감복하던 백성들이 다투어 군에 응모하였다. 적병이 고을의 북쪽에 둔치(鈍置)하고 있었는데, 공이 적들이 보는 앞에서 광대무리를 시켜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꽃 모자를 써 온갖 유희를 벌이게 하니 적들이 이를 보고 웃고 떠들었다.

이 틈을 타 공이 용맹한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몰래 역현(驛峴)을 돌아 일제히 뛰쳐나가니 광대 무리들이 함께 공격하였고, 성중(城中)의 노소(老少)들이 또한 북을 치며 뒤따랐다. 이로써 대승을 거두니 죽인 자의 수효를 이루 다 셀 수 없었고, 공도 10여 군데의 부상을 입었다.

병사를 모아 잠시 쉬도록 하였는데 왜적들이 다시 병(兵)을 모아 추격해오니 한편 싸우며 한편 퇴각하던 중 말의 발이 진흙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공은 손으로 말의 갈기와 꼬리를 잡아 끌어내어 다시 오르려는데 왜장이 칼을 던지매 공은 이를 피하였으나 그만 말이 이에 맞고 거꾸러지고 말았다. 공이 급히 성에 들어가 만호(萬戶) 박천추의 말을 빌려 타고 적을 유인하니 적이 쫓아왔다. 공이 거짓으로 패한척하고 도망치다 금교(金橋)의 진흙 밭에 이르러 말을 옆구리에 끼고 번개처럼 이를 지나니 적들은 쫓아오다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공은 말을 돌려 한 칼로 모두 진살(盡殺)하였다. 그때서야 정부군도 함께 달려들어 적들을 섬멸하였다. 사태가 평정된 후 공은 집으로 돌아가 예제(禮制)를 지키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사람들의 말이 혹 ‘적을 섬멸한 일’에 미치면 공은 “기복(起復)하여 싸움터에 나선 것은 임금의 명에 따른 것이 아닌데 이에 상을 바란다면 이는 네가 부끄러워할 일이다.”고 하였다. 얼마 후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으니 고을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길 “우리 고을이 오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양공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참판 이기경(李基敬)이 전(傳)을 지었고 유선(諭善: 왕세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손강서원의 관원으로 품계는 당하(堂下) 3품-종2품이며, 학덕이 있는 문관이 겸직하였다.) 윤득부(尹得孚)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으며 목사 임육(任育)이 행장을 지었다.<계속>
 

글=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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