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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은 부여 정통을 강조하여 마한남부 연맹세력을 견제하였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72>마한남부 연맹과 통합을 이룬 백제 성왕(下)

‘새로 쓰는 영산강유역의 고대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마한의 역사를 정리하는 글을 연재한 것이 햇수로 3년, 70여 회를 넘어가고 있다. 빈약한 자료를 가지고 마한사를 오랫동안 서술하는 것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마한사에 애정이 깊은 유인학 전 의원은 필자의 의욕도 대단하지만, 지면을 오랫동안 할애하고 있는 영암신문의 뚝심 또한 칭찬하고 싶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천착할수록 마한사의 역사적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고, 그 중심에 위치한 영암이 지니는 공간적 위치의 중요함도 알게 된다. 필자의 오랜 생각을 맘껏 펼칠 기회를 준 본보에 감사할 따름이다.

무령왕 대에 ‘담로’라는 행정구역이 충남과 전북 즉 노령산맥 이북지역을 중심으로 22곳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살폈다. 주서(周書)에 ‘5방’의 언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백제 말에 확인되고 있는 ‘5부 37군 200성’이라는 행정구역이 주서 작성 당시에 있었음이 분명하다고도 하였다. 주서는 백제 위덕왕 시기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무령왕 이후인 성왕 무렵부터 위덕왕 시기 사이에 새로운 행정구역이 편성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영산강유역의 다시들 지역에 ‘5방’의 하나인 ‘남방=구지하성’이 설치되고, 22곳의 담로가 37개 郡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노령산맥 이남의 마한남부 연맹이 백제와 통합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추가로 편입된 15곳 대부분이 주로 노령산맥 이남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5방 37군 행정구역 개편의 의미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마한남부 연맹과 백제의 통합이 성왕 16년(538)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칭할 무렵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구체적인 시기 설정까지 하였다. 필자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주서에서 언급된 5방의 위치 가운데 북방을 ‘웅진성’(공주)이라 한 것을 보면, 웅진성이 수도가 아닐 때임이 분명하다. 5방은 지방행정 단위를 설명하는 것이고, 수도를 북방이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웅진성이 5방에 편성된 것은 사비 천도 이후의 사실임이 분명하다. 또한 남방의 구지하성이 영산강유역을 가리키고, 담로가 설치되었던 22곳에 추가된 15지역이 대부분 노령 이남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새로운 행정구역은 마한남부 연맹을 통합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남부여’로의 국호변경도 마한통합 시기를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성왕 16년 조에 ‘봄에 도읍을 사비(일명 소부리라고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할 때의 지명이 ‘사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위의 백제 본기에 ‘봄에 도읍을 사비(일명 소부리)로 옮겼다’라고 되어 있어 이를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사비’를 일명 ‘소부리’라 하였다는 세주(細注)가 있고,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백제 때 소부리군’이었다고 한 것에서 아마도 천도 이전의 지역명이 ‘소부리’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말하자면 천도하면서 ‘소부리’에서 ‘사비’로 지명 변경이 있었다고 믿어진다.
 
‘남부여’를 국호와 수도 명칭으로 삼다


그런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공주목조에 “성왕이 ‘남부여’로 천도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말하자면 ‘남부여’가 국호가 아닌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후대에 ‘백제’ 대신에 새로이 나온 국호인 ‘남부여’를 지명으로 혼동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국여지승람 책임자인 서거정의 직필 태도로 볼 때, 그러하였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오히려 웅천주에서 수도를 옮겼을 때 ‘소부리’였던 지명을 ‘남부여’라고도 실제 불렀을 수도 있다고 본다. ‘남부여’를 지명으로 살핀 사례는 필자가 처음이지만, 성왕이 수도를 ‘소부리’로 옮기며, 국호와 새 수도 이름을 모두 ‘남부여’로 했다고 믿어진다. 

이와 같이 성왕이 국호와 수도 이름까지 모두 ‘남부여’로 바꾸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바처럼, 부여족 계승을 강조함으로써 백제 왕실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성왕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475년 수도인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백제는 왕실 사당인 동명묘(東明廟)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여 부여계로서의 왕실 체통이 떨어지고 정체성의 혼란까지 겪고 있었다. 이에 494년 부여가 고구려에게 병합되자, 부여를 계승한다 하여 ‘남부여’라는 명칭이 나온 것이라는 의견에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호 변경이라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정책을 성왕이 취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법하다. 말하자면 성왕의 부여계 계승 강조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다. 필자는 백제와 마한남부 연맹과의 통합에서 이유를 찾고 싶다. 성왕은 즉위 초만 하더라도 무령왕 대에 이어 고구려와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으나 7년 3만 여 명이 동원된 오곡성 전투에서 2천여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면서 위기에 처하였다. 성왕 10년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12년 ‘형혹성이 남두성 자리를 침범하였다.’는 삼국사기 기사는 불안정한 당시 왕권을 상징한다.

성왕은 고구려와 전쟁을 통한 끊임없는 긴장을 조성하여 난국을 돌파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18년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것이나, 26년 신라의 도움으로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기록들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신라의 도움으로 한 때 한강유역을 회복하기까지 하였다.
 
백제와 마한남부 연맹의 대등한 통합

이와 같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성왕에게 마한남부 연맹과의 통합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을 것이다. 무령왕 때만 하더라도 양직공도에 수많은 방소국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한남부 연맹은 성왕 당시 건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합이 시급한 성왕은 마한남부 연맹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1대1의 대등한 통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실제 행정구역 개편에서 추가된 15개 군이 노령이남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도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37군 가운데 노령이남 지역이 15군을 차지하였다고 하는 것은 마한남부 연맹의 정치적 지분을 완전히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마한과 통합을 추진하면서 성왕은 한편으로는 마한남부 연맹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당시 백제 왕실이 부여계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표방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국호는 물론이고, 수도 이름까지 ‘남부여’라는 명칭을 사용한 배경이 아닌가 한다. 최근 국호 개칭이 성왕이 영산강유역 마한세력을 복속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가 나왔다.

즉,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을 병합한 성왕이 마한 세력들에게 백제 왕실이 부여계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다. 물론 ‘백제의 마한 병합’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에 필자와는 견해가 다르나, 마한세력의 통합을 국호 변경과 관련지어 설명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마한세력과 갈등을 유발했던 성왕

여하튼 마한남부 연맹과 대등한 통합을 추진한 성왕이 부여계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원래 마한계는 물론 새로 백제 지배세력으로 편입된 마한남부 연맹세력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성왕이 사비 천도 후에도 추진한 무리한 대외원정은 통합 후의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신라가 차지한 관산성을 성왕이 공격하려 할 때 적극 반대하였던 ‘기로(耆老)’라 불리는 집단은 어쩌면 마한계통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내부갈등을 전쟁을 통해 극복하려는 성왕의 의도는 그의 죽음이 웅변한다. 결국 성왕이 마한남부 연맹세력을 적극 포용·융합보다 부여계라고 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갈등을 부추겨 이후 전개되는 혼돈의 빌미가 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무왕은 성왕의 시행착오를 교훈삼아 마한세력과 철저한 융합을 시도하며 정국을 안정시켜갔던 것이다.<계속>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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