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71>마한남부 연맹과 통합을 이룬 백제 성왕(上)

필자는 이제껏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마한이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이병도 선생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논증하였다. 그리고 498년 동성왕 때에 역시 백제가 마한을 복속시켰다는 또 다른 주장 역시, 설득력이 없음을 최근 다룬 바 있다. 그렇다면 마한 남부 연맹체가 백제와 언제 통합되었을까? 그리고 그 방법도 무력에 대한 강제 병합일까? 아니면 ‘대등’한 수준의 1대1 통합일까? 또는 백제에 의한 ‘흡수통합’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기록이 없어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으나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다. 이제 그 해답을 찾을 시간이 된 것 같다.

마한은 백제와 언제 통합되었을까? 양직공도에 마한남부 연맹의 여러 나라들을 ‘방소국’이라고 한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직공도가 작성된 521년 무렵까지는 마한남부 연맹이라는 독자적 정치세력이 존재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때가 무령왕 재위 말엽으로, 그 무렵까지는 마한의 여러 나라들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따라서 마한의 통합은 적어도 그 이후 어느 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남부여’ 국호변경과 행정제도 개편

앞서 필자가 서동설화를 다루며, 무령왕에 이어 즉위한 성왕 때 추진된 ‘남부여’로의 국호 변경이 단순히 부여계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관념적인 의미를 넘어 마한남부 연맹과의 통합을 이룬 이후에 나타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을 한 바 있다. 이를테면 국호 변경이 새롭게 백제 영역으로 편입된 마한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남부여’로의 국호 개칭이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을 병합한 이후, 왕실의 출자인식인 ‘부여’를 강조하여 왕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정치적 지향점이었다고 살핀 견해는 시사적이라 하겠다. 물론 백제에 의한 마한 ‘병합’이라 하여 대등한 수준의 1대1 통합이라고 주장한 필자와는 의견이 다르지만, 국호변경을 마한 통합과 관련지어 설명한 점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성왕 재위시기에 마한과 백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추론이 가능한 셈인데, 이와 같이 성왕 무렵에 ‘대등한 수준의 통합’이든, ‘강제 병합’이든 간에 통합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필자가 보는 또 다른 근거로, 백제의 지방행정 제도의 변화를 들고 싶다. 백제의 지방행정 제도에 대해 양직공도에 설명이 나와 있다. 즉 “중국 군현과 같은 ‘담로’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22곳이나 된다”는 것이다. 양직공도가 521년 당시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무령왕 대에 ‘담로’라 불리는 지방행정 구역이 22곳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독자들이 역사시간에 무령왕 때 ‘담로’제가 시행되었다고 공부한 내용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백제의 지방행정 구역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나와 있는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백성, 76만 호로 되어 있는데, 이때 와서 웅진·마한·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도독부를 다시 나누어 두고 각각 주와 현을 통할하게 했으며, 우두머리를 발탁해 도독·자사·현령을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주목된다. 이 기사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이 옛 백제영역을 직접 다스리기 위하여 5도독부를 비롯하여 행정구역을 새롭게 재편할 때 언급된 내용이다. 이때 ‘본래’ 5부 37군 200성이라는 표현에서, ‘5부 37군 200성’이 멸망 이전 백제의 지방행정 제도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백제의 행정구역에 대해 중국의 ‘주서(周書)’ 백제전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백제 건국 시기부터 성왕 다음왕인 위덕왕 25년까지의 사실을 자세히 전하고 있는 주서 백제전은 단순히 전사(前史)를 그대로 전재(轉載)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를 많이 첨가하고 있어 웅진 천도 이후의 백제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백제의 지방행정 제도를 보면, “동서 450리, 남북 900여 리이고, 수도가 고마성이고, 그밖에 5방(方)이 있다. 중방을 고사성, 동방을 득안성, 남방을 구지하성, 서방을 도선성, 북방을 웅진성이라 부른다”라고 하여 ‘5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주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남방’

주서의 위 기록은 557년부터 581년 사이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당시는 백제와 주가 활발히 통교를 하던 위덕왕 때이다. 말하자면 5방과 37군, 그리고 200여 개의 성이 지방행정 구역이 있었다는 것이다. 곧 당이 언급한 ‘5부’는 원래 있는 ‘5방’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주서의 이 내용은 무령왕 말기까지 존속하였던 22곳의 ‘담로’와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새로이 편성된 지방행정 제도가 성왕 이후부터 위덕왕 재위기에 마련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다른 선학들도 주목하였지만, 무령왕대의 ‘담로’ 중심의 행정제도와 이후 만들어진 행정제도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먼저 ‘郡’의 상위 행정기구로 새롭게 ‘方’이 설치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만약 ‘담로’와 ‘군’이 서로 대응된다면 ‘군’을 통할하는 광역의 새로운 행정제도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방의 위치들을 통해 이때 새롭게 편성된 지방행정 제도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방의 치소 가운데 ‘중방’은 현재의 고부지역에 해당하는 ‘고사성’, ‘북방’은 공주에 해당하는 웅진성으로 놓고 있다. 고부가 중앙에 위치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고사성 보다 아래에 있어야 되는 ‘남방’의 위치가 어딜까 궁금해진다.

‘5방’ 위치 가운데 다른 곳의 치소 비정은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으나 ‘남방’의 치소에 해당하는 ‘구지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필자 역시 ‘구지하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결론을 유보한 바 있지만 이번에 이 문제를 상론하고자 한다. 일부에서는  ‘구지하성’의 위치에 대해 ‘구지지산’이라는 지명이 있는 전북 김제지역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나 김제 서남쪽에 있는 고부가 중방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러할 확률은 낮아 보인다. 또 장성지역으로 비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게 볼 근거 또한 충분치 않다. 최근 고려대 박현숙 교수는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않은 채, ‘남방’ 치소를 ‘광주 또는 나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응준’의 정치세력이 있었던 복암리 일대

필자는 복암리 고분군이 있는 다시들 일대, 곧 지금의 나주지역이 아닐까 추정한다. ‘구지하성’이라는 명칭이 ‘매’를 상징하는 ‘구지’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한 점에서 역시 ‘매’를 상징하는 ‘응준’이라는 명문이 출토된 복암리 고분 일대와 남방 치소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두힐’이라는 명문이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훗날 당이 설치한 대방주의 치소였다는 점이 확인되었던 것도 이곳이 남방의 치소라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라고 여긴다. 이렇게 ‘남방’의 위치를 나주 일대로 비정한다면, 이제 영산강유역 일대가 백제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비로소 마한과 백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방’ 밑에 있는 37개 ‘郡’을 주목하려 한다. 이미 양직공도에서 ‘담로’는 중국의 군현과 같다고 하였듯이, ‘담로’가 후에 ‘군현’으로 명칭변경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그렇다면 무령왕 시기와 비교하여 군현이 15개소 정도 추가되어 설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선학의 연구에 의하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와 있는 지명들이 당시 백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곧 노령산맥 이남 지역에 대체로 15개의 군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곧 무령왕 이후에 새로 추가된 군현들이 대부분 이들 지역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곧 무령왕 무렵까지는 노령산맥 이북지역 일대까지만 백제의 영역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전남지역은 그 이후에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는 얘기이다. 이는 양직공도의 방소국에 전북지역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말하자면 무령왕 대에는 전북지역까지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보면 노령산맥 이남 일대는 성왕, 위덕왕 재위기에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아무래도 성왕 16년 538년 사비천도 이전이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앞서 추론한 바와 같이 마한통합과 ‘남부여’로의 국호변경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다음호에 상론하기로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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